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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생애
3. 선거 이력
4. 여담

1. 소개

橋本龍太郎 (はしもと りゅうたろう) 교본용태랑

1937.07.29 ~ 2006.07.01

일본정치인, 82/83대 총리. 도쿄 시부야구 출신.

2. 생애

대장성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자부 고등학교[1]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치인들의 비서진으로 활동하다가, 1963년 정치인이었던 부친 하시모토 류고(橋本龍伍, 1906~1962)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중의원 오카야마 제2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서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하였다. 즉, 2세 정치인. 사촌 형인 하시모토 아키라(橋本明)는 아키히토 덴노와 가쿠슈인 동창이자 친구이다.

외조부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緑一郎)이다.

1970년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후생성 차관에 임명된 후 오히라 마사요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이후 토시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에서 여러 부처의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1년 대장성 장관 시절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를 끝장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동산 대출 총량규제를 실시하여 잃어버린 10년을 열어버린 인물이다. 물론 거품 해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조치였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여러가지 정책수단과 적절한 규제를 조합해서 연착륙을 유도했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당시 하시모토의 정책은 쉽게 말해서 은행들한테 "더 이상 대출하지마!!!"하고 윽박지르는 식이였는데 이게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냈다는 비판이다.

자민당 위주의 내각을 다시 열었으며, 1995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가장 큰 라이벌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후생성 장관을 큰 표차로 따돌리고 총재에 당선되었으며 이어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총사퇴로 82대 수상이 되었다.

9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오자와 이치로신진당을 물리치고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와 합쳐 연립여당의 안정 과반수 확보에 성공하며 비교적 강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이후 행정개혁(정부부처 개편), 경제구조개혁, 재정구조개혁, 금융구조개혁, 사회보장개혁, 교육개혁 등 6개 개혁을 당면과제로 삼고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어쨌거나 이러한 개혁이 효과가 없지는 않아서 1995년도에 경제성장률이 조금씩 회복되던 상황속에서 이러한 신호가 내수시장이 정상궤도로 돌아온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1997년 4월 소비세를 3%에서 5%로 인상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소비가 급속히 위축된데다가 거기에 아시아 외환위기로 일본의 주요 금융회사들이 잇따라 파산하면서 잃어버린 10년이 연장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결국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지것은 당연했고 1998년 7월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44석을 확보하는 참패를 거두며 물러났다. 사실 소비세 인상(3%→5%, 1997년 4월부터 적용)은 그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당시는 80년대 후반 버블경제의 몰락이 이미 중장기적인 경기침체 수준으로 악화된 시점이었다. 일단 부동산, 주식가격의 폭락으로 인해 국민들은 현금성 자산 저축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래서 저축만 하고 소비를 좀처럼 하지 않다보니 가처분소득이 원활하게 순환하지 못했는데, 이게 경기침체 단계로 진입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소비심리를 촉진할만한 부양책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소비세를 올려버리니 소비심리가 위축되어버린 것이다. 소비심리 진작을 위해 노력하던 전임 정권들의 노력[2]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버렸다. 사실 1995년부터 경제성장률이 서서히 다시 오르고있던 상황이었던지라 이를 세수확보를 할 철호의 기회라고 오판을 하는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버블붕괴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던 상황이라는 점을 철저하게 간과했다.

그래도 총 재임기간은 2년 7개월로 90년대부터 등장한 총리 가운데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다음으로 긴 재임기간.

일본의 주식가격 변화

하시모토 류타로 임기동안 일본경제는 주가하락, 실업률 폭등과 함께 아시아 금융위기를 발생시킨 주범이라는 지탄을 받았고 그로인해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때부터 시작된 미국 빌 클린턴 정부의 시장경제 개방에 대한 압력이 절정에 이르렀다.일본경제 이에 분노한 하시모토 내각은 미국과 철저하게 대립각을 세웠고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2차대전 이후로 최악으로 험악한 관계를 보였다.

미국, 차기 수상 선임 앞두고 일본 때리기 나서

미국미국 언론들이 하시모토 류타로의 총리직 사임을 메인뉴스로 보도했을 정도로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하시모토 류타로 시절 최악의 갈등을 겪었다.

이후 2001년 다시 한번 총리직에 도전하였으나 파벌 정치의 종식을 기치로 내건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패하면서 꿈을 접었다. 그 이후 2004년 불법자금 문제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검찰에 소환될 뻔 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로서 당내 최대계파인 하시모토파는 쇠퇴를 시작했다.

2005년 지역구에서 은퇴하고 전국구 공천을 받지 못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2006년 지병인 대장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8세. 다만, 그의 지역구는 차남인 하시모토 가쿠(橋本岳, 1974~)가 물려받았는데, 하시모토 가쿠는 44, 45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낙선하였으나, 46회부터 3회 연속 당선되어 (석패율 비례대표 초선을 포함해) 4선 의원이 된다.

일본 정치권에서 최초로 "작은 정부"론을 도입한 인물로, 고이즈미가 그 정책의 맥을 잇는다고 평가받는다. # 특히 본인이 대장성 대신을 역임했음에도, 부처 중의 부처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장성 분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대장성은 재무성과 금융청으로 분할되고, 예산기능은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어갔다.

1996년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으며,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과도 1998년 ASEM에서 회담한 바 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74,564 (18.9%)

당선 (2위)

초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3,838 (16.0%)

당선 (4위)

재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77,489 (17.7%)

당선 (1위)

3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5,489 (14.2%)

당선 (3위)

4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61,157 (12.4%)

당선 (5위)

5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04,395 (20.1%)

당선 (1위)

6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09,964 (20.9%)

당선 (1위)

7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85,647 (16.5%)

당선 (2위)

8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32,067 (26.2%)

당선 (2위)

9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77,693 (32.0%)

당선 (1위)

10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2구)

자유민주당

150,714 (28.4%)

당선 (1위)

11선[3]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52,595 (68.0%)

당선 (1위)

12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28,888 (65.6%)

당선 (1위)

13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오카야마 4구)

자유민주당

104,653 (56.5%)

당선 (1위)

14선

4. 여담

검도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시모토 시절의 자민당 선거 광고 중에 검도 대련하는 컨셉의 광고가 있다.

사실 하시모토 류타로도 총리 재임 중에는 우익 성향이라는 평을 들었던 인물이다. 1996년 독도에 선박 접안 시설을 건설하려 했을 때, 영유권 문제를 거론했기 때문.

동아리 후배 중에 훗날 자민당 총재가 되는 다니가키 사다카즈가 있었다고 한다.

비서 중에 에다 겐지가 있었다.

중국인 애인을 뒀는데 중국인 스파이란 소문이 돌았다. 하시모토 측에서는 불륜은 인정했으나 해당 여성은 중국 대사관에서 만난 사이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일본 정부 역사상 가장 여성 편력이 화려했던 총리들 중 하나로 유명했기 때문에 사후 12년이 지난 지금도 평판이 영 좋지 않다. 심지어 중국인 애인을 뒀던 사건이랑 맞물려서 아예 하시모토 류타로 본인이 말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상태였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있다.


  1. [1] 스즈키 슌이치, 다니가키 사다카즈, 히라누마 다케오 등이 여기 고등학교 출신이다.
  2. [2] △9조엔 규모의 종합경기대책 발표(1992.8., 국채 및 지방채 발행폭 확대를 통한 공공사업 실시, 재정투융자 자금 추가방출, 주택취득에 대한 융자확대) △엔고 진행 저지를 위한 재할인율 인하(1993.9.) 등
  3. [3] 일본 중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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