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애니메이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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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년 이전
2. 태동기 - 1956 ~ 1960년대
3. 1970 ~ 1980년대
4. 1987 ~ 1993년
5. 1994 ~ 1999년
6. 2000년대
7. 2010년대
8. 2020년대

1. 1956년 이전

해방 전 한국에서 제작된 최초의 애니메이션은 1936년 11월 25일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에 실린 <개꿈>이다. 청림촬영소 스튜디오에서 김용운, 임석기가 참여해 만든 첫 작품이며, 강아지가 의인화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성인 취향의 풍자적인 작품에 가까울 것으로 추측되며, 약 3분 분량을 제작 완성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완성조차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일본에서 군국주의를 홍보하는 애니메이션 <모모타로 : 바다의 신병> 등의 제작에 참여한 김용환 화백이 해방 전에 귀국해 서울에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차리는 등 국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 위한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주위의 이해부족과 투자경비 확보에 실패 등의 이유로 기획 단계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국산 애니메이션 1호 제작이란 구체적인 성과물은 10여년 뒤에야 빛을 보게 되었다.

2. 태동기 - 1956 ~ 196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사는 한국 광고로고송의 역사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애니메이션은 영상물이란 특징이란 전제 하에 일반인들은 영화관이나 TV를 통해서만 이의 감상이 가능하다.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보통 일반 실사 영화보다 제작 경비의 3배 이상이 투입되는 관계로 우리의 초창기 만화 영화는 극장용 애니보다 먼저 다소 조잡한 형태의 TV 광고용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 애니메이션 제1호는 1956년에 국내 최초 민영방송인 HLKZ-TV의 방송국 미술부 소속인 문달부 씨가 만든 OB시날코 광고이다. # 또한 같은 해 럭키치약 CF가 만들어졌는데 오랫동안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HLKZ-TV는 1959년 2월 2일에 방송국 건물이 화재로 사라지면서 전파송출이 중단되었다.

문달부의 바통을 이어받은 분은 신동우 화백의 형인 신동헌 화백이었다. 당시 그와 같이 애니 제작에 가담한 제작진은 그의 문하생 출신으로 출판만화의 작가로 활동하던 넬슨 신(신능파)이었다. 한편 럭키치약 CF 이후 1960년대 초반에는 2~3분짜리 극장용 CF 제작 붐이 일었다. 극장용 CF는 본 영화의 상영 막간 쉬는 시간에 상영되었으며 제약회사의 상품 선전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 당시 많은 작품들이 '신능파 동화제작소'에서 제작되었다. 1960년에 제작되어 부산 경남극장에서 첫 선을 보인 후 상영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까지도 한국 초창기 애니메이션 하면 생각날 정도로 큰 히트를 친 애니메이션은 진로소주 CF인 진로 파라다이스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으로 이 진로소주 CF를 꼽을 정도로 유명했다. 이 CF는 이후 진로재팬이 ジンロパラダイス라는 이름 그대로 2004년 일본에서 방영했다.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해당 CF의 제작을 맡은 분은 바로 신동헌이 신능파의 그림에다 동생인 신동철의 컬러 작업을 덧대 완성되었다. 이 외에도 뽀뽀비누, 미원, 트리오, 활명수 등의 CF 애니메이션들이 당시 극장 막간 상영물로 인기를 끈 대표 작품들이었다.

1959년에는 최초의 정부정책 홍보 애니메이션으로 김용환 화백의 대표 캐릭터 '코주부'를 등장시킨 <쥐를 잡자>였다. 이후 1962년에는 <개미와 베짱이(5분, 35mm 촬영)>가 만들어졌다. 이 애니는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의 미술실장인 박영일이 정도빈에게 제작을 의뢰해 영화 자막 제작용 셀을 이용해 완성했다. 그림은 만화가인 한성학이, 촬영은 일본 니혼대학 영화학과를 유학한 이경복이 맡았고 음악은 정영주, 현상은 이종상이 맡았다. 정책 홍보용 애니메이션은 이후에도 활발하게 제작되어 1963년에 박영일, 정도빈 등이 주도하여 만든 <나는 물이다>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 초반에는 <걸리버여행기(1939년작, 1961. 5. 11. 대한극장 상영)>, <아라비안나이트(1959년작, 1962. 1. 3. 세기극장(현 서울극장) 상영)>, <신데렐라 공주(1950년작, 1962. 7. 26. 대한극장 상영)> 등의 미국 극장 애니메이션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개봉돼 관객들을 경이의 세계로 몰고 갔다. 선진국의 애니메이션들이 국내에서 잇달아 개봉돼 관객이 몰리자 이에 자극받은 국내 만화 관련 인사들 사이에선 "우리도 독자적으로 상업 만화영화를 제작하자"는 기운이 일게 되었다.

이로써 1967년 1월 7일, 신동헌 감독이 첫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니, 그것이 바로 동생 신동우 화백이 소년조선일보에 작품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한 <홍길동(1967)(세기상사[1] 제작 및 배급)>이다. 이 애니메이션은 1년의 제작기간이 소요되었고 애니메이터로는 유성웅을 비롯해 당시 만화가인 정욱(대원씨아이의 창업주), 김대중이었다. 제작 당시 부족한 제작비뿐만이 아니라 재료 조달 자체가 힘들어 미군이 폐기한 필름을 재사용하는 등의 악조건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서울에서 수십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때만 해도 일본과의 애니메이션 수준 차이가 거의 없었다. #

<홍길동(1967)> 제작 당시 상황에 대해 신동헌 화백은 "셀 작업 전용물감이 없어 포스터컬러로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림이 말라 떨어져 나가 촬영 전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등 무수한 난관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작품 배급 과정에서 불공정한 수익분배 계약을 맺느라 작품은 당시 극장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은 엄청난 빚을 얻어 살던 집을 날리는 등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홍길동(1967)>의 성과를 바탕으로 신동헌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인 <호피와 차돌바위(대동영화제작소 제작. 합동영화, 극동필림 공동 배급)>영상이 8월 15일에 개봉되었지만 흥행은 홍길동(1967)보다 못했고 이 두 애니를 마지막으로 신동헌 감독은 극장 애니 제작에서 손을 뗐다.

이 와중에 강태웅이 메가폰을 잡아 제작한 인형(퍼펫) 애니메이션 <흥부와 놀부(영상)>가 보름 전인 7월 30일에 서울 명동 중앙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홍길동과 황금철인, 흥부와 놀부를 배급한 세기상사는 신동헌 감독이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하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수입/배급하기도 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홍길동 장군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다른 스텝들과 제작했지만 이 또한 흥행에서 실패한다.[2] 결국 세기상사는 여러 번 참패를 거두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포기하고 70년대에 영화 제작이나 배급을 했다가 별로 성공하지 못하고 이후로 대한극장 운영에만 주력했다.

홍길동의 수익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면 흥행과 제작의 선순환이 이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돈 번 사람 따로 망한 사람 따로인 결과만 남고 말았으니 한국 애니메이션은 시작부터 팔자가 꼬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홍길동>뒤의 우리 애니메이션 제작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이 대중문화의 한 영역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으면서 우리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태동을 한 것이다.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극장 애니메이션 손오공(1968. 1. 1.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개봉)을 비롯해 일본의 인기 애니인 황금박쥐를 모방한 <황금철인 (1968. 7. 25. 국제극장)>, 홍길동의 3편격인 <홍길동장군(용유수 감독. 1969, 7. 22. 시민회관)>, <보물섬(박영일 감독. 1969. 1. 1. 시민회관)> 등이 이때 만들어졌던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은 1960년대 말을 고비로 제작 열기가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초적 기술 축적이 미흡한 단계에서 상업적 흥행에만 집착한 나머지 수준 미달의 작품이 대량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관객이 외면한 건 당연지사. 이렇게 '최초의 국산 만화영화'니, '순수 국내작품'이란 호기심으로 극장 애니메이션이 개봉될 때마다 영화관을 찾았던 관객들은 속속 수입 개봉된 우수한 외국 애니를 접하고 나서 우리 애니와는 커다란 수준 차이가 있음을 피부로 느꼈다. 의욕만 앞선 채로 국산 애니를 잇달아 만들어낸 태동기의 우리 애니메이션계는 이 때를 계기로 슬럼프로 빠지게 되었다.

3. 1970 ~ 1980년대

1972년에 제작된 <괴수 대전쟁> 이후 1976년까지 우리 애니메이션계는 단 한 편도 극장 애니를 제작하지 못했다. 그러던 게 1976년에 와서 김청기, 임정규 감독이 등장함에 따라 로봇이 등장하는 일련의 'SF 애니메이션' 제작으로 한국 애니메이션은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다. 김청기 감독이 제작한 애니메이션인 로보트 태권 V가 극장 개봉되어 대히트하게 된 것이다. 김청기 감독은 로보트 태권V 이후에도 태권V 우주작전, 태권V 수중특공대, 황금날개 1.2.3 등으로 연속해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김청기 감독의 작품 이외에도 임정규 감독의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별나라 삼총사, 박승철 감독의 77단의 비밀 같은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개봉되면서 방학 때가 되면 어린이들을 노린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되는 흐름이 만들어지게 된다.

외국 작품의 하청 작업을 처음 맡은 곳은 1965년에 동양방송이 TV방송을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 전담 부서(실장은 한성학)가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일본과의 합작형식 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요괴인간> 등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박영일 감독을 비롯해 임정규, 이준웅 등이 당시 TBC를 통해 배출된 애니메이터들이다.

이어 1969년에는 최초의 민간 하청생산 전문업체 '국제아트프로덕션'이 세워졌고, 여기서 김성칠, 임정규, 김일남 등이 주로 미국 애니의 채색 작업을 맡았다. 이러한 하청 작업을 통해 나름의 기술을 다진 이루 애니메이션계는 1979년 5월, 넬슨 신에 의해 미국으로부터 6작품의 애니 전 공정을 모두 하청받기도 했다. 이를 보아 선진 애니 제작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기술 수준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또 1980년대에는 미국에서 활동한 교포 출신 애니메이터들이 속속 귀국해 이들을 통한 하청 생산도 늘어나 한 때 우리나라는 자체제작 TV 애니메이션이 없음에도 이러한 것들과 연관된 판매 외형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이런 애니 하청작업은 아무리 번성한다 해도 핵심적 기술을 축적하는 걸로 연결이 안 된다는 단점이 있다. 하청작업은 단지 싼 인건비에 의한 단순 작업만이 반복적으로 강요되고 하청업체는 인건비의 차익을 챙기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애니 하청 작업은 국가 경제적 측면에선 외화 획득에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나 우리 애니의 질적 발전에는 그닥 기여를 못했다는 걸로 평가된다. 이마저도 1990년대 들어 우리나라의 인건비가 올라감에 따라 선진국의 원청업자들이 하청 물량을 중국, 필리핀 등 인건비가 싼 곳으로 거래처를 옮기게 되었다. 하청 생산구조의 허약한 경쟁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또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노하우 축적에는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당초 목표였던 TV애니메이션의 제작은 공익성을 강조하는 당대의 방송 풍토속에서도 제작비 문제로 줄줄히 연기되거나 무산되면서 반쪽짜리 성과에 그쳤다는 점도 간과할수 없다.

하청생산이 주류를 이루었던 1970년대에 한국산 로봇 애니메이션이나 SF 애니메이션들이 흥하다가 1980년대에 접어든 후 5공의 탄압[3]에 의해 만들어지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4] 심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제는 여전했지만[5], <은하전설 테라>, <컴퓨터 핵전함 폭파대작전>, <슈퍼 삼총사>, <슈퍼 타이탄 15>, <다이아트론 5> 등등 1980년대에도 한국산 로봇 애니메이션이나 SF 애니메이션은 계속 만들어져 방학 때면 개봉을 했고 공휴일이면 TV에서 방영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야구 붐을 타고 박기정 선생이 1964년에 낸 동명의 만화 원작을 영상화한 <황금의 팔>이나 <독고탁 태양을 향해 던져라>, <내 이름은 독고탁>, <다시 찾은 마운드>로 이어지는 독고탁 시리즈 같은 야구 애니메이션이 개봉했으며, 김청기는 계속 로봇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는 와중에 종교 성향을 그대로 담아낸 애니메이션인 <다윗과 골리앗>이나 당시 유행하던 과학 소년 성향을 반영한 <꾸러기 발명왕> 같은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진 흐름 속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으니, 우선 대놓고 만행을 저지른 표절이 문제였다. 작품 전체적으로 베낀 예도 많았고, 로봇 애니메이션의 경우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특촬물 속의 로봇을 그대로 가져와 베낀 예가 빈번했다.[6]

이러한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 애니메이션이 바로 대원미디어에서 1985년 공개한 <비디오 레인저 007>. 당대 여타 한국산 로봇 애니메이션을 능가하는 완성도로 인기를 끌었던 비디오 레인저 007이었지만, 실제는 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 비디오 전사 레저리온을 대원미디어에서 하청 제작하면서 통채로 셀화를 빼돌려 찍어낸 도용작이었다.

한편, 불안정한 수익 구조 및 이와 대비되는 하청 애니메이션 시스템의 대두 또한 문제였다.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흥행이란 불확실한 요소에 의해 수익이 좌우되는 데 비해, 똑같이 애니메이션을 그린다 해도 일본이나 미국 애니메이션을 하청 제작하는 경우 훨씬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애니메이션 하청 업체 종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흐르는 코피를 지폐로 막으며(...) 그렸다고 한다.

거기다 80년대로 들어온 후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경쟁력 자체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에서는 흑백으로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데 비해 극장에선 컬러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으나, 80년대로 들어와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고 컬러 TV가 폭발적으로 보급되자 컬러로 되어 있다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사라져 버렸다. 텔레비전에선 볼 수 없는 로봇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선 볼 수 있다는 점이 그래도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경쟁력으로 남아 있었지만, 80년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비디오와 지역유선방송의 보급이 큰 폭으로 확대되고 이 통로를 통해 여러 일본산 거대로봇 애니메이션들이 가정에 있는 TV로 전해지면서, 어린이들은 굳이 극장에 가지 않아도 한국산보다 더 높은 완성도의 로봇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한국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던 이들이 창작보다 하청에 종사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면서 1985년을 기점으로 극장판 애니메이션 제작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매년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김청기 감독도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1986년에 실사 장면을 중심으로 만든 <외계에서 온 우뢰매>를 내놓으면서 순수 애니메이션에서는 손을 뗀다. 결국 1986년 개봉된 각시탈을 끝으로 극장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은 자취를 감추기에 이른다.

4. 1987 ~ 1993년

한국 애니메이션의 전성기

하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은 극장에서 사라지면서도 TV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미 1980년 말부터 컬러 TV의 시대가 열렸고 컬러TV 수상기의 보급이 시작되어 TV는 대중 매체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편성이 고정화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애니메이션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당시 늘어난 애니메이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건 외국산 애니메이션이었다. 당시 어린이 시간대에 방영한 애니메이션의 대부분은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작품이었으며, 한국작품이라고 해봐야 뽀뽀뽀에서 방영한 몇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이나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 정도에 그쳤다.[7] 당시 KBS와 MBC(70년대 당시 TBC도 포함)의 외국 애니의 방영 치중은 자체 제작의 경우 30분짜리가 약 7천만 원의 경비가 소요되지만[8], 일본 등 외국의 완성작을 수입하면 자체 제작비의 1/20 수준인 3백여만 원이면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언론이나 주부들로부터 외국 애니메이션 어린이 시간대 고정방영과 국산 애니메이션 부재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랐지만 방송사에서 국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해명만 내놓고 얼버무리던고 당국에서도 TV프로그램에 대해 직 간접적으로 통제가 이루워졌던 시점이었음에도[9] 뭘 쳐먹었는지 TV애니메이션 제작 압박을 가하지 않았다.

사실 국산 TV만화영화 제작계획은 이미 1960년대 말부터있었다고는 하지만 TBC에서 황금박쥐의 성공이후로 자체적으로 TV만화영화를 제작 하려다가 제작비가 예상보다 많이 나온다는 점때문에 포기했으며 KBS와 MBC도 역시 제작비 문제로 포기했다.[10] 언론통폐합 이후로 KBS나 MBC나 명목상으로 공영방송이었기 때문에 역시 TV만화영화 제작계획이 다시금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때문에 국산TV만화영화 제작은 연기된 상태였고 덕택에 1980년대 들어와서도 어린이 시간대를 미국과 일본 만화영화가 채우고 있었던것은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이때 판을 바꿔놓은 일이 있었는데 바로 시청료 거부운동이었다. 매달 2500원에 달하는 고가의 시청료를 걷고(절대 2010년대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1980년대 초중반에는 신문 한달 구독료 정도였다.) 한창 광고수입이 증가하던때였음에도 국산 만화영화는 거의 편성되지 않았고 보도프로그램은 땡전뉴스라는 말이 나올정도 당시 방송은 정권의 통제를 직 간접적으로 받고있었는데 이에 대한 저항으로 시청료 거부운동이 퍼지기 시작하자 [11] 시청자들의 저항에 직면한 방송사들이 궁여지책격으로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논의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고, 거기에다가 때마침 1986년의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상황까지 겹치면서 올림픽 홍보용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자는 의견이 정부차원에서도 나오면서 국산 TV만화영화에 대해 구두로 방영지시를 내리기도 했고 TV애니메이션이 죄다 수입이라서 국내 아이들이 문화적인 주체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의견이 방송사 내부에서도 제기되면서 본격적으로 TV애니메이션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여하튼 그 덕택에 예상보다 조금 늦어지기는 했지만 MBC에선 88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소재로 한 달려라 호돌이(대원동화 제작)를, KBS에선 이현세의 인기 원작을 영상화한 작품인 떠돌이 까치(대원, 신영, 세영 3개사 제작)를[12] 방영했고 이 작품들은 기대 이상의 반향을 부르며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처음 방영한 작품들의 성공을 본 KBS는 다시 인기 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이자 최초의 프리스코어링 작품 아기공룡 둘리와 최초의 시리즈물인 동화나라 ABC(20분짜리 6편), 까치의 날개를, MBC는 이상무의 원작을 애니메이션화한 독고탁의 비둘기 합창과 과거 큰 인기를 끈 마루치 아라치의 후속작인 태권동자 마루치를 이어서 제작 방송하게 되었고, 1988년에는 처음으로 시리즈[13]로 제작된 한국 애니메이션인 달려라 하니가 KBS2에서 방영되어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른다.

이후 KBS에선 달려라 하니가 방영된 시간인 금요일 저녁으로 시간대를 고정하고 회당 25분 정도의 길이인 시리즈 애니메이션 형태로 천방지축 하니, 옛날 옛적에, 영심이, 날아라 슈퍼보드 등의 작품을, MBC에선 공휴일이나 명절 때를 노려 90분이 넘는 정도의 분량의 특집 애니메이션 형태로 장독대머털도사, 흙꼭두장군, 꿀벌의 친구, 도단이 같은 애니메이션을 방영하는 방식이 어느 정도 고정되는 모습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이 당시의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에도 한계가 없던것은 아니었다. KBS의 경우에는 시청료 거부운동에 대한 트라우마로 공익성을 내세워야했던데다가 일단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애니메이션을 편성했다는 점때문에 애니메이션 제작 편수가 MBC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았지만 그럼에도 제작편수가 그렇게까지 많은것은 아니었기때문에 재탕, 삼탕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했기 때문에 인기 만화나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었으며,[14] MBC의 경우에는 재탕도 재탕이지만 장편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그래서 이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어린이 시간대의 다수를 수입만화영화로 채우는것은 여전했다는 것이었다. 즉, 수입애니메이션을 일정부분 대체하기는 했지만 어린이 시간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까지 높지 않았다는 것. 다만 애니메이션 제작 예산에 대한 지원 및 규정방안이나 프로그램 편성 규정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이전이라는것을 감안해야되기는 할것이다.

어쨌든 199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 애니메이션계가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 애니의 뿌리를 찾고 또 대중문화상품으로서 높은 완성도의 작품을 만들어 일본, 구미 등지의 선진국과 당당히 경쟁해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은 비록 미국, 일본에 뒤진 게 우리 애니계의 현실이지만 지금부터라도 경쟁력을 지닌 우리의 것을 제작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1993년 이후 제작된 일련의 장편 애니들은 속속 극장 영사기에 걸려 관객들의 엄청난 평가를 받았다. 우리 만화영화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 모색된 것이다.

5. 1994 ~ 1999년

한국 애니메이션의 쇠퇴기

이렇게 방송사의 주도 하에서 어느 정도 한국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탄력을 받고 있었지만, SBS가 출범[15]한 이후 초롱이의 옛날여행사랑의 학교[16], 펭킹 라이킹이 별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데다가, 아무리 광고판매율이 100%에 육박했던 시절이라 해도 애초에 애니메이션을 수입해서 방영하는것이 훨씬 싸게 먹혔으니 수입을 선호하는것이 당연했는데 1980년대 후반의 국산 TV만화영화 제작붐이 불었던것이 시청료 거부운동과 올림픽에 힘입어서라는 점이 컸던데다가 정부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했다해도 한들 어차피 구두로 지시한 정도인데다가, 애니메이션 제작 안한다고 해서 법적으로 제재를 먹는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제도적인 지원이 없던 상태에서 진행된 것인지라 시청료 거부운동이 주춤해지면서 방송사를 압박하는 동력이 약해진데다가 기대 이하의 흥행실패작이 나오면서 자연스레 "돈이 안되는: TV 애니메이션 제작은 과도한 제작비 및 방송사 내부의 상업적인 논리에 밀려서 위축될수밖에 없었고 그때문에 90년대 중반에 다시금 수입 애니메이션의 비중이 높아졌던것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신문과 뉴스에서 흥미로운 통계를 갖고 나온다. 당시 국회의원들이 "쥬라기 공원 영화 한 편이 거둔 흥행성적과 컨텐츠가 자동차 100만대 판 것보다 더 나간다"면서 국회 차원의 문화컨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육성과 지원을 제안한 것. 이는 중공업 위주의 기존 산업구조에서 점차 문화컨텐츠 자체가 산업이 되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한 사건이다. 실제로 이후 정부 차원에서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이 대거 이뤄지고, 대학교에서도 애니메이션, 영상, 영화 관련 학과들이 생겨나는 등 인재 양성 측면에서도 상당한 배려가 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런 종류의 계획이 당장 효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TV판 애니메이션 지원하면 당장 효과를 거두긴 하는데 장기적인 계획으로서 꾸준히 지원이 이뤄졌는데, 특히 이전까지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아예 관심이 없던 정부와 지자체 등에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열거나, 문화콘텐츠개발원 같은 공기업을 건설하는 등 간접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이렇게 정부과 국민들의 시선이 바뀐 것만 해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변화를 만든 것이었으나...

반면에 애니메이션 제작 양성을 위한 직접 투자의 결과는 영 좋지 않았다. 이것 또한 시작은 좋은 의미로 한 것이었고, 실제로 어찌됐든지 간에 정부가 지원한 자금 덕분에 나중에 망한 애니메이션들이 그나마 제작이라도 될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원을 받은 대부분의 제작자들이 먹튀였다는 것(...). 대강의 기획만 내놓고 지원금을 받아낸 후 그냥 날라버리거나, 지원받은 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작품을 내놓고 흥행에 실패하는, 그러고도 제작자들은 빼돌린 지원금으로 돈을 남겨먹는 먹튀가 속출하여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에 찬물을 끼얹고 만다. 이 지원의 첫 수혜를 입은 애니메이션이 바로 블루시걸이다. 당시 제작사 측이 '국내 최초의 성인만화영화'라는 홍보에 주력해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지만 작품 퀄리티에선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블루시걸의 실패는 의욕만으론 좋은 작품을 내지 못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이란 명목으로 극장에 등장한 슈퍼차일드는 영상 면에서도 이야기 면에서도 여러 모로 이전 시대에나 어울릴 법한 작품이었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원조가 부활한다 해서 큰 기대를 모았던 돌아온 영웅 홍길동은 사실상 일본의 드래곤볼 제작진이 다 만들어 놓은 애니메이션이었으며, 이규형이 자신이 원작을 썼던 만화를 감독한 헝그리 베스트 5는 일본의 3류 애니업체 ROBOT에 맡긴 탓에 결과물은 제작비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의심이 가는 수준이었다. 농담조로 제작비를 룸살롱 가서 회식비로 다 썼냐고 까기도 했다. 애니메이션화협객 붉은매가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다. 이 작품들은 결과물이라도 나왔으니 소리 없이 사라진 다른 작품들보다는 나을지도...

게다가 싼 인건비를 바탕으로 전성기를 구가한 하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국내 인건비가 높아져 가면서 점점 위기에 빠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하청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회사들이 살아남으려면 결국 창작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밖에 없고, 많은 하청 제작사들이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에 뛰어들면 한국 애니메이션에 르네상스가 올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하청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는 것과 처음부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으며, 제작사들의 능력 부족만 두드러졌다.

일각에선 하청 제작사이면서도 실력을 인정받던 업체들이나 대원미디어 같은 거대 하청 제작사들이 뛰어들면 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도 있었지만, 실력을 인정받던 회사들은 높은 인건비로 다른 하청 제작사들이 나가떨어지는 와중에도 기존의 실력을 바탕으로 계속 하청 의뢰만을 받았으며, 큰 기대를 모았던 대원미디어는 아예 애니메이션 제작 부서를 싹 정리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런 먹튀 행위의 최대 사례로 손꼽히는 아마게돈이 1995년에 제작되었다. 아마게돈의 경우도 프로젝트 시작 자체는 성공적으로 보였는데, 한국 최고의 만화가 중 한 명이었던 이현세 화백의 원작으로 최대 수준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이 작품마저 실패함으로써 그야말로 대재앙급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작품 내적으로는 긴 내용의 원작을 극작용으로 무리한 압축을 하는 바람에 이야기 전개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제작비에 걸맞지 않은 낡은 스타일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작품 외적으로는 제작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았는데, 총제작자인 이현세가 만화가로서는 신이었지만 애니메이션 쪽은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여서 애니메이션 스탭들과 충돌이 많았고, 또 이를 달래기 위한 위로 비용으로 제작비의 상당량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사운드 녹음을 위해 미국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1억 원 어치의 사용료를 내고 고음질의 레코딩을 해왔는데, 필름이 손상되어서 그 사운드를 전부 날려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국 흥행에서 대참패를 한 아마게돈으로 인해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 자체에 대한 정부 지원은 사실상 중단된다. 그리고 다른 기업들도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허공으로 날려버린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어 한동안 애니메이션 쪽 스폰서가 되기를 꺼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현세 화백은 아마게돈의 제작 실패경험을 <아마게돈 백서>에 기록해 우리 애니메이션계가 안고 있는 취약한 부분을 적시하고 앞으로 만들어질 애니메이션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이 책에선 아마게돈의 수익 대차대조표도 수록되었는데, 제작에 소요된 경비 25억 3백만 원에 비해 수입은 13억 8천 7백만 원에 불하여 순 손실 금액이 11억 1천 6백만 원에 달했다.

그래도 1996년에 극장 개봉된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17]은 공중파에서의 인기를 다시금 증명하며 흥행 몰이에 성공했으나, 뒤를 이어 1997년 여름방학에 극장에 공개된 왕후 에스더, 난중일기, 임꺽정 같은 애니메이션은 시대착오란 느낌이 들 정도로 굉장히 부족한 작품이었다.

특히 박형인이 감독을 맡고 박무직이 캐릭터 원안을 맡아 PC 게임을 애니메이션화한 전사 라이안은 제작비 30억 원과 전문인력 450여 명을 들여 2년 간 긴 작업을 거쳐 첨단 제작기술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모은 관중은 15만 명에 수익은 4억 원에 불과했다. 해당 애니의 실패 원인으론 애니 내용을 포함한 소프트웨어 부분의 전반적인 개발부진과 관객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이야기 소재 및 감각이 크게 부각되었다. 이후 외환위기로 인해 <아이온>이나 <천지수뢰>, <잠든 신천지 카씬> 등 기획중인 애니 제작이 무산되거나 보류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그래도 나머지 극장애니 제작은 멈추지 않아 한국-대만 합작 애니 <또또와 유령 친구들>, <예수> 등이 만들어졌고, 1999년에 공개된 철인사천왕 역시 나름 공을 들이기는 했지만 결과는 시원찮았다.

위와 같이 우리 애니가 제작자들의 의욕적 창작 의지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에게 무시당하는 이유는, 이들이 수준 높은 외국 애니에 익숙해져 있고 이로 인한 '평가의 눈높이'가 늘어난 것이 큰 원인이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진 우리 애니들은 하나같이 '국내 기술진에 의한 제작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일본의 기술이 그대로 도입되는 후진성을 면치 못하였다. 심지어 "일본의 A급 애니메이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작품의 퀄이 좌우된다"는 한 제작 실무자의 고백도 있었다.

이렇게 극장판 한국 애니메이션이 연이어 죽을 쑤는 가운데, 수입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방영으로 케이블 1위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투니버스는 한국 작품을 등한시한다는 시선을 벗어나고자 하는 한편 새로운 도전의 의미까지 덧붙여 영혼기병 라젠카의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는데, 자세한 것은 영혼기병 라젠카 항목을 참고하자.

그러나 이런 실패 속에서도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계속 기획되었고, 이와는 별개로 90년대 중후반부터 방송사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어느정도 불어져서 TV판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재차 활성화 되어 두치와 뿌꾸, 녹색전차 해모수, 바이오캅 윙고, 스피드왕 번개, 검정 고무신, 레스톨 특수구조대, 하얀마음 백구 같은 TV판 애니메이션들이 공중파에서 방영되어 호응을 얻으며 한국 애니메이션을 이어갔다.

6. 200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암흑기

하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TV판 애니메이션도 위기에 빠지게 된다. 사교육 열풍으로 과거에 비해 TV를 볼 수 있는 어린이들의 수가 감소했고, 같은 시기에 불어닥친 예능/드라마의 대폭 양산으로 인해 방송사들도 돈이 되는 드라마와 예능에 집착하고 애니메이션을 경시한 탓에 시청률도 하락함에 따라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는 점점 앞으로 당겨지더니 급기야 오후 4시까지 오게 되었다. 이제 시청자가 직접 찾아보지 않는 한 TV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어려워진 셈이다. 게다가 <치카치카 폼폼이>, <매직키드 마수리> 등과 같이 시청자들에게 단 한 마디 사과도 없이 조기 종영되는 작품도 늘어났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2005년 7월부터 신규 국내제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쿼터제가 시행되기 시작했다. 신규 국내제작 애니메이션 쿼터제란 지상파 3사는 전체 방송 시간 중 1%, EBS는 0.3%를 신규로 제작된 국산 애니메이션으로 의무 편성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 규정의 취지는 신작 한국 애니메이션의 방송 분량을 늘리자는 것이었으나,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예산 문제에 대한 고려가 없어 역효과만 일으켰다. 방송사들의 재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의무 편성 비율은 지켜야 하니 작품 하나당 방영권료는 점차 하락했다.[18] 방영권료가 하락하니 애니메이션의 품질도 떨어지게 되어 결국 저퀄리티의 작품들만 양산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당연히 방송사 입장에서는 수준 낮은 프로그램을 좋은 시간대에 배치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 또다시 애니메이션을 암흑 시간대에 배치하면서 시청률은 바닥을 기는 악순환을 낳고 있다. 참고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TV판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더욱 시궁창이었다. 쥬라기 공원의 꿈을 담은 지원 정책은 2000년대에 와서도 이어졌지만 결과는 엉망이었다. TV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극장판으로도 개봉했지만 극장에서 본 사람이 누가 있는지 궁금한 런딤[19], 제작 기간이 몇 년이나 걸렸지만 소리소문 없이 개봉했다가 사라진 아크[20], 1990년대부터 만들고 있다더니 2004년에 와서야 개봉해서는 별 말 없이 퇴장한 망치, 긴 제작기간과 100억이라는 엄청난 제작비 속에 한국 애니메이션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으나 결국 업계를 초토화시킨 원더풀 데이즈먹튀만 가득했던 상황.

먹튀가 아닌 작품들 역시 거기서 거기였다. 마리이야기오세암이 안시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는 성과(애니메이션계의 깐느 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한 격이다)를 거두었지만 결국 극장에선 성과를 내지 못했고[21] , 하얀마음 백구의 제작진이 다시 한 번 열정을 다한 오세암 같은 작품은 극장도 제대로 잡지 못해 잘 만들어지고도 관객과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한편 오세암이 수상했던 2004년 당시 안시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대상을 두 번 이상 받은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면 일본, 미국, 프랑스밖에 없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22]

2007년 마리이야기의 이성강 감독이 다시 한번 메가폰을 잡고 천년여우 여우비를 1월에 개봉했으나, 하필이면 같은 애니메이션인 태권V의 디지털 복원판이 같이 개봉하면서 충돌했다. 그래도 각각 70만 관객으로 여우비의 경우 손익분기점인 100만을 넘기진 못했으나 나름 평타는 쳤고, 태권V 또한 30~40대와 10대 어린이들이 동시에 모이는 효과가 생기면서 그럭저럭 성공한 편이었다. 2010년 8월에 개봉한 마법 천자문 극장판은 그래도 원작이 인기가 있는데다 상영관을 꽤 잡고 개봉하면서 성과에 대해 희망을 좀 걸어볼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여러가지 이유로 좋은 성적를 거두지는 못했다.(12만 명 정도)

7. 201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의 중흥기 그리고 더더욱 앞으로

2000년대 내내 절망적인 상황이 연출되던 와중에, 2011년 7월 개봉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 개봉 첫주 최다관객 동원(229,901명)과 최단 기간 50만 관객 돌파(8일)로 2007년 디지털 복원판 태권V가 세운 기록을 갈아치우더니, 마침내 개봉 11일째인 8월 6일 오전 10시 누적 관객수 733,433명을 동원해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우는 성과를 올리고 있으며, 급기야 전국 220만 관객을 동원하여 역대 한국 개봉 애니메이션 흥행 9위로 마감하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적은 상영관 수와 교차상영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이뤄낸 값진 성과이다.(쿵푸팬더 2만 해도 3달 장기 상영 끝에 전국 500만 관객을 모았다)

2012년부터는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케이블방송종합편성채널로까지 확대되었다.

뽀롱뽀롱 뽀로로의 뒤를 이어 유아용 애니메이션의 대세가 된 로보카 폴리, 장족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는 안녕 자두야라바, 내수시장만으로도 굉장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아동용 애니메이션 변신 자동차 또봇, 치링치링 시크릿 쥬쥬 등이 나오면서 적어도 이제 "우리나라는 아이들용 애니메이션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비판에서는 벗어나는 데 성공했으며, 2014년 들어서부터는 또봇헬로 카봇의 성공으로 자체적으로 만드는 거대로봇물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한 동안 답이 없었던 고연령층 애니메이션 분야도 스튜디오 애니멀이 제작한 고스트 메신저로 일말의 가능성을 보이면서 일선 회사들이 고연령층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에 나서고 있다. 2014년 노블엔진에서 몬스☆패닉을 애니화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2015년에는 웹툰 노블레스를 원작으로 한 ova, 노블레스: 파멸의 시작이 국내외,특히나 해외에서 높은 기대와 감탄을 사면서 각광받고 있다. 그리고 2015년 11월, 넥슨이 G스타 프리뷰에서 자사 게임을 애니화하는 넥슨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

다만 넥슨의 게임사업부문 매각결정의 영향 때문인지 클로저스는 방영일이 들쑥날쑥하며 아르피엘은 1화가 채 나오기도 전에 엎어졌다. 현재 무사히 마무리된건 엘소드가 유일하다.

게임 광고에도 애니메이션을 넣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클로저스, 사커스피리츠, 주사위의 신, 에픽세븐, 사이퍼즈, 데스티니 차일드, 메이플스토리, 그리고 웹툰 갓 오브 하이스쿨의 게임광고에 1분 40여초 짜리 애니메이션이 수록되었는데 역동적인 전투신으로 호평받았다.

마당을 나온 암탉겨울왕국의 흥행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한국인들의 편견도 많이 사라진 덕분인 건지, 2010년 이후로 아스타를 향해 차구차구, 터닝메카드, 플라워링 하트, 신비아파트 : 고스트볼의 비밀, 생일왕국의 프린세스 프링 등 성공한 애니메이션도 나오기 시작했고, 투자비용도 늘어나고 있다. 넥슨이나 CJ같은 대기업들의 애니메이션 투자도 활발해지고 있는 상황.

예술성 측면에서도 상당히 인정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오세암의 대상 수상 이후에도 제불찰씨 이야기, 소중한 날의 꿈, 집, 은실이, 사이비, 서울역 등이 지속적으로 안시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 2016년까지 총 2편이 대상을 수상하고 8편이 진출했는데, 이 수치는 미국, 일본, 프랑스 다음 가는 수치. 또한 '의자 위의 남자'가 안시에서 단편 경쟁부문 대상, '연애놀이'가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단편 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다만 2019년에 개봉한 언더독이 20만도 안되는 관객수로 마감하는 등 아직 더 나아가야 할 길이 많다고 할 수 있다.

2019년 7월 25일에 개봉한 레드슈즈언더독보다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호평을 받았다.

2019년 7월 27일에 스튜디오 애니멀에서 탱크가이의 웹툰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베이글녀가 되어 있었다'를 원작으로 한 시리즈 애니메이션 제작이 상당부분 진행되었다고 발표하였고, 12월 2일, 라프텔에 올라왔다.

2019년 8월 2일에 코믹콘 서울에서 이희윤 네이버 웹툰 사업팀장이 신의 탑노블레스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제작을 검토 중이라 밝혔다.출처

네이버 웹툰의 자회사 LICO에서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초단편 시리즈물 연애하루전을 공개하였고, 귀전구담고교생을 환불해 주세요의 단편 애니메이션도 공개하였다. 그리고 숏애니 형식의 사소한 냐냐도 올리고 있고, 연의 편지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제작 중이라고 한다. 그외에도 다양한 웹툰들을 단편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만들어서 많이 올렸다.유튜브 채널

2019년 10월 31일, 8년동안 미루어지던 애니메이션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가결되면서 애니메이션 산업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8. 2020년대

웹툰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제작에 시동이 걸리고 있다. 2020년에 기기괴괴 성형수편 극장판, 연의 편지 극장판, 슈퍼시크릿 시리즈 애니메이션, 시타를 위하여 시리즈 애니메이션, 이계 검왕 생존기 시리즈 애니메이션 등이 나올 예정이고, 신의 탑 애니메이션도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출처

웹툰을 통해서 한국 애니메이션의 아쉬운 점이었던 청소년, 성인 대상의 애니메이션 부재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마침 2020년대는 애니메이션 시장에 개방적인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젊은 세대가 대거 성인이 되어, 혹은 소비를 할수 있게 되는 충분한 경제력을 갖추어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발판도 어느정도는 마련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0년 1월 30일 컨퍼런스콜에서 한성숙 네이버 대표가 신의 탑, 노블레스, 갓 오브 하이스쿨 애니화 방영을 계획중이라고 발표했다.출처 다만, 세 웹툰의 애니메이션판은 일본의 애니 제작사에서 제작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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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대한극장이 이 회사 계열사이다.
  2. [2] 풍운아 홍길동이나 호피와 차돌바위 모두 작품성, 줄거리, 움직임, 원화 등 많은 게 열악했던 작품이니 어떻게 보면 실패는 당연했다.
  3. [3] 사실 1980년 8월에 국보위의 사회정화운동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방송협회 측이 발표한 '방송자율정화방안'에 따라 TV프로그램 가을 개편 시에 불량 만화영화 등 폭력 프로그램 배제를 한 적이 있다. 결국 이마저도 1980년대 초반경에 실효를 보지 못했다.
  4. [4] 정병섭군 자살사건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나빠졌지만, 이건 1972년의 일이라 1970년대에 흥했던 한국 애니메이션이 1980년대에 정부 때문에 망했다는 식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되지 않는다. 물론 수익이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5. [5] 반공 애니메이션은 제외. 반공 애니메이션을 보면 상당히 잔혹한 장면들이 나오는 데다가, 해돌이의 대모험에서는 아예 어린이가 총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청기 감독은 반공 애니메이션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 표현을 만화 속에 넣을 수 있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자신은 거대한 악마가 사람을 집어삼키는 장면을 애니메이션에 꼭 넣고 싶었는데 어린이들이 보기에는 너무 잔혹하다는 이유로 계속 검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일교포가 북한의 꼬임에 넘어가 북으로 갈 때 비유로써 북한의 지도가 입을 쩍 벌린 거대한 악마로 변하고, 그 입으로 일가족이 탄 배가 들어가는 장면을 넣자 단번에 통과되었다고 한다.
  6. [6] 예를 들자면 가면 쓴 샤아가 가면을 벗으니 아무로의 얼굴이 되는 우주 흑기사나 고그가 뛰어다니는 무적철인 람보트, 다이라가XV를 통채로 가져온 슈퍼 타이탄 15 같은 것.
  7. [7] 1990년대 기준으로 방영분의 약 60여%가 일본 애니였다.
  8. [8] 1986년 기준으로 30분짜리 작품 한 편당 제작비는 4000만~5000만원 선이었다.
  9. [9] 당시 방송통제 수준이 어느정도였냐면 KBS 뉴스 9과 MBC 뉴스데스크의 방송시간이 9시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공보처에서 뉴스시간을 9시로 정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시가 뉴스시간이 된 것.(MBC는 2010년대에 8시로 시간대로 옮겼지만)
  10. [10] 사실 이때는 테이프를 비싸다고 해서 한번 쓴 테이프를 대부분 재사용했던 시절이었으며 그래서 1980년대 중반 이전의 방송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11. [11] 1981년에 컬러TV 수신료가 2500원으로 정해졌는데, 당시의 2500원은 당대 소득 수준(1980년 기준 1인당 GNP 1549달러)을 고려하면 4-5만원 정도의 수치로 상당히 비싼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시청료가 2500원으로 정해지고 나서 KBS에서 상업광고를 편성해서 재정적으로 풍족한 상황이었고 MBC도 광고시장의 성장으로 프로야구단도 운영할 정도로 매출이 늘어났다. 뉴스 앞부분을 지도자 찬양 보도로 채워놓는 건 기본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애써 언급을 회피하거나 편파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여전히 어린이 시간대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들은 극장판 재방 빼면 죄다 외제였으니(더군다나 주요 TV프로그램이나 공익광고에선 국산품 애용하자, 외화 낭비하지 말자며 선전하고 반일감정도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광고판매율이 100%에 육박했을 때도 이런 방송사의 유체이탈은 계속 이어졌지만) 당연히 시청자들의 불만이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시청료 거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
  12. [12] 특히 떠돌이 까치는 원작도 크게 히트를 쳤다.
  13. [13] 아기공룡 둘리는 외견상 시리즈물로 보이지만 초기 방영 당시에 여러 편을 묶어서 편성하였다.
  14. [14] 사실 1980년대와 90년대 만화 가운데 인기작들이 만화영화로 제작되지 못한것도 이때문이었다. 비록 애니메이션의 제작 편수가 늘어났다지만 수십편의 만화를 일일히 애니화하기에는 국산 애니메이션 편성과 제작금액에 배정된 편성시간이나 예산이 너무 적었던 것.
  15. [15] SBS에서 빛돌이 우주2만리라는 애니메이션을 방영했지만 한국, 미국, 프랑스 합작이었고 흥행에도 실패했다. 게다가 이 SBS 개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타 방송사들의 애니메이션 제작 예산이 크게 깎였다는 후문도 있다. (<그때 그 시절 KBS 이야기> 참조) 그래서 이 두 건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던 것.
  16. [16]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 원작.
  17. [17] 90년대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 흥행과 비평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작품이었다. 물론 그 뒤에도 흥행은 참담했지만, 평은 좋았던 오세암이나 마리이야기 같은 수작들도 있었고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18. [18] 애초에 편성 비율을 지킬 만큼 한국에서 TV 애니메이션이 활발하게 제작되는 것도 아니었고, 2000년대 이후 애니메이션의 투자 대비 수익률도 크게 떨어진 상황이었다.
  19. [19] 광고부터도 망할 징조가 보였다. "내가 네 수호천사가 되어줄게." 강수진이 연기한 이 닭살돋는 연기를 광고에 써먹었고, 시사회장에서도 이 대사가 나올 때 비웃느라 난리였다. 시사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휴대폰으로 주구장창 욕하고 나갔던 생생한 목격담이 있다.
  20. [20] 이 작품은 1999년 뉴타입 한글판에서도 제작 정보가 소개되고 기대를 모으더니만 이내 흐지부지되다가, 미국과의 합작 애니메이션으로서 2004년에 미국 개봉을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그냥 그런 평가와 함께 잊혀졌다.
  21. [21] 솔직히 이런 것은 전문가와 일반인의 시각에 따른 차이가 있다. 그리고 대중성이 낮은 작가주의 애니메이션들이 상업적으로 성공 못 하는 건 다른 나라도 비슷하다.
  22. [22] 이후 헝가리와 브라질도 2회 수상이라는 영광을 얻었지만, 2016년 기준으로 이 두 나라는 단 2번 경쟁부문에 진출해서 2번 수상한 것이고 한국은 8번 진출해서 2번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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