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wiki style="margin: -10px -10px"

주식회사 한국일보사
株式會社 韓國日報社
HANKOOK ILBO

}}}

국가

대한민국

창간

1954년 6월 9일

설립

1977년 12월 14일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7 (남대문로5가)[1]

대표자

이준희

임원진

회장 승명호
대표이사 사장, 발행·편집인 이영성
경영지원실장 · 인쇄인 · 상무 권동형

업종명

신문발행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임직원

354명 (2018년 12월)

매출액

700억 916만 원 (2018년 연간)

영업이익

4억 3,254만 원 (2018년 연간)

순이익

43억 7,220만 원 (2018년 연간)

그룹

동화그룹

최대주주

동화기업 (주) (지분 60.04%)[2]

사이트

공식 홈페이지[3]

SNS

1. 개요
2. 사시
3. 역사
4. 역대 임원
4.1. 상임고문
4.2. 명예회장
4.3. 회장
4.4. 부회장
4.5. 사장
4.6. 수석부사장
4.7. 부사장
4.8. 대표 보전관리인
5. 역대 법정등록인
5.1. 발행인
5.2. 편집인
5.3. 인쇄인
6. 역대 주요 간부
6.1. 주필
6.2. 논설고문
6.3. 논설주간
6.4. 논설위원실장
6.5. 논설간사
6.6. 편집국장
7. 역대 제호
8. 사옥
9. 사가
10. 홈페이지에 대해
11. 2013년 한국일보 사태
12. 2014년 이후
13. 기획·특집
13.1. 기획
13.2. 연재
14. 관련 문서

1. 개요

"세상을 보는 균형"

"누구도 신문을 이용할 수 없다"

- 백상 장기영[4]의 창간사


2002년부터 2015년 6월 8일까지 사용한 제호.[5]


변경후 제호

대한민국의 조간 종합 일간 신문. 동화그룹 계열의 일간 신문사이다. 이미 1950년대부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여 1970~80년대는 국내 최대 수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이었고, 1990년대에도 발행부수가 200만부에 달했던 4개의 신문사 중 하나였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IMF 외환위기를 전후하여 급격히 사세가 기울었다. 단적으로 1996년에 발행부수 212만 부라고 자랑하던 신문이 2018년 현재 기준 발행부수 20여만 부 수준의 규모로 쪼그라들었다. 같이 200만부를 넘어섰던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도 신문 발행부수나 영향력이 급속히 축소되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영향력을 어느정도 행사하고 있는것에 비하면 너무도 처참한 추락이다. 언론 매체 관련 각종 여론조사를 참고해 보면, 오프라인 뿐만 아니라 온라인 영항력에서도, 심지어 언론사 신뢰도 측면에서도 영향력이 미미해졌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언론계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에게는 한때 꽤나 네임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신문 자체의 역사가 꽤 길기도 한데다가, 잘 나갈 때 국내 신문업계 최초로 시행한 시도들이 많았고, 실제로 195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까지는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로 상당히 인정받는 매체였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별로 이름있는 언론 축에 속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고, 사람들에게 큰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다.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다

기득권층에 대한 태도가 조중동의 그것보다는 비판적이지만, 한경오의 그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한마디로 자타공인 중도 성향의 신문이며, 신문사 스스로도 국내 유일의 중도 신문임을 내세운다. 대한민국 언론사들 가운데서 물의를 빚은 게 비교적 적었고, 좋게 말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나쁘게 말해서 무색무취로 보도한다. 어떤 경우에도 여야의 입장을 골고루 싣고, 사건사고 기사가 아닌 다음에는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조차 반론을 충분히 싣는 편이다.

굳이 따지자면 기계적 중립을 지향한다. 보통 언론의 중립이라는 게 비판적 중립이라면, 한국일보는 중도적 시각으로 일관성 있게 기사를 쓴다고는 하지만, 주로 보수적 기사 하나, 진보적 기사 하나 쓰면서 양적인 균형이나 기계적인 중립을 맞춘다고 보는 것에 가깝다. 독특한 점은 기자들이나 논설위원들 사이의 정치적 성향이나 논조의 차이가 매우 크고, 이것이 지면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떻게 한 신문사에서 이렇게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논설위원들이 각각 다른 입장을 같은 지면에 내보낼까?' 하는 지적이 있을 정도.[6]

2000년대 말에 들어 아래의 2013년 한국일보 사태를 비롯한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한 중도를 내세울 때보다는 중도 진보에 가까워졌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지만,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이후 진보 정권으로 교체된 후에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보수적 논조의 칼럼, 사설, 기사 등이 많아졌다는 지적이 있다. 다시 말해 한겨레경향신문에 비해서는 보수적이고, 조중동보다는 진보적이지만, 어느 한 정파성에 매몰된 논조를 유지하지는 않고, 여전히 특유의 중도적 시각에서 기계적 중립의 스텐스를 유지한다. 한편, 2015년에 동화그룹의 자회사로 편입된 이후 신문사의 재무 사정이 나아지자, 기자들의 연봉이 과거에 비해 대폭 인상되었다고 한다. 이 즈음에 한국일보 경제면을 중심으로 기사의 논조가 다소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지적도 있다.

사실 예전부터 정치부보다는 사회부 쪽이 강한 신문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7] 1960년부터 일본 요미우리신문과 제휴관계를 유지 중이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이다.

2. 사시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

3. 역사

1954년 백상 장기영 창업주가 <태양신문> 판권을 인수해 창간했다. 1957년에 경영난에 시달리던 HLKZ-TV의 지분을 인수하여 한국 최초의 신방겸업을 이루어내기도 했고, 1957년 미스코리아 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했으며, 1958년 조석간제를 실시했다. 1960년 <서울경제신문> 및 <소년한국일보>도 창간했다. 그러나 1962년 '신당 사회노동당' 기사 사건으로 장기영 사장, 홍유선 편집국장 등 3명이 구속되고 3일간 휴간되기도 했다. 1964년 국내 최초 주간지 <주간한국>을 창간하기도 했지만 1968년 목조 사옥 본관에 큰불이 나 전소되고, 진화 중이던 사원 7명이 순직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1969년 구 본사 자리에 신관을 지으며 <주간여성> 및 <일간스포츠>를 창간했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첫 해외지사를 세웠다. 1978년 주식회사로 법인전환했다.

1960~70년대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부수 1~2위를 다툴만큼 메이져급 신문으로써 명성을 떨쳤고,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조선, 중앙, 동아와 함께 4대 일간지로 꼽혔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면서 언론 업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대선1992년 대선을 거치면서, 과거 보도지침이 횡행하던 시절에 비해 언론의 자유도가 높아졌고, 언론 매체의 인허가 또한 대폭 늘어난 것이다. 또한 지상파 방송인 SBS가 개국을 하는 등 언론의 무한 경쟁 체제가 확립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1990년 즈음부터 신문들은 본격적인 증면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80년대까지만해도 일반적으로 8면에서 12면 정도 발행하던 신문들이 40면에서 많게는 80면까지 발행하기 시작한다.[8] 이때 한국일보는 한국 신문업계 사상 초유의 조석간 동시 발행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더 많은 신문을 찍기 위해 윤전기를 늘려야 했고, 배달을 위한 지국도 늘려야 했다. 필요한 돈은 은행에서 빌렸고, 빚은 무한정 늘어났다. 조석간 동시 발행은 91년 12월 16일부터 93년 12월 1일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는데, 이 일은 회사의 재무 상태를 급격히 나빠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격적이고 무리한 경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심지어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도 조선, 중앙, 동아에게 서서히 밀린 상황을 지속적인 부수 확장전략으로 메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며 채무가 더욱 급속도록 불어났다. 이후 IMF 외환위기까지 겹치면서 한국일보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을 거듭하게 되었다.

언론계 일각에서는 1993년 故 장강재 회장의 별세 이후 형제들간에 벌어진 경영권 다툼으로 한국일보의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신문산업 무한 경쟁의 최대 패배자 된 한국일보 50년사의 명암) 또 1980년 서울경제신문 폐간에 따른 재정적 부담 역시 이에 일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창업주인 백상 장기영이 자매지를 내면서 여기저기 손을 뻗기도 했는데 코리아타임즈[9], 서울경제신문, 주간여성, 소년한국일보, 서울경제TV, 주간한국[10], 엘르, 톱모델, 프리미어, 일간스포츠, 스포츠한국, 학생과학 등이 있다. 그 이전까지로 가 본다면 HLKZ-TV를 인수해서 2년 정도 운영했던 일도 있었고 소년한국일보에서 만화출판업을 겸하여 합동출판사와 함께 1982년 결별시까지 독점에서 양대산맥을 이룬 적이 있었다. 소년한국일보를 통해 데뷔하거나 활동한 만화가로는 신영식, 박기정, 엄희자, 길창덕, 김수정, 허영만, 박봉성, 김동화, 이원복, 임웅순 화백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1977년 1월에 미국의 타임-라이프 북스와 합작으로 타임-라이프 북스의 한국어판을 번역, 출간했던 한국일보 타임-라이프라는 별도의 출판사를 설립하였으나 외환 위기 이후에 폐업했다. 자세한 내용은 타임라이프 문서 참조.

이 중 코리아타임즈와 서울경제신문은 완전히 독립된 별도 법인이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곳으로 보면 되고 주간한국은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시사주간지였다가 문화주간지로 전환되었다. 스포츠한국은 무가지로 한국일보 신문에 같이 끼어서 나오기 때문에 사실상 하나의 신문이라고 봐도 된다. 일간스포츠는 장기영의 장손 장중호가 분리하여 나갔다가 결국 중앙일보에 넘어갔다.

또 1950년대 중반 이후부터 다른 신문에 앞서 견습기자 공개채용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기자를 양성한 곳으로도 유명하고, 그들 중에는 오인환, 심명보, 권혁승, 조세형, 이원홍, 박현태 등처럼 공직에까지 오른 분도 있어서 '기자 사관학교'로 이름을 날렸다.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한국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주간지 붐을 일으킨 시초가 되었다. 1993년부터 활판제작 대신 CTS로 전환한 후 1998년부터 가로쓰기를 실시했다.

중앙일보와 악연이 좀 있는데 1965년에 중앙일보가 창간될 당시 다른 신문사에서 기자들을 스카우트할때 한국일보는 이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어 편집국 인원 25명과 업무, 광고 분야 인원 상당수를 잃어서 사주의 경제부총리 입각과 더불어 큰 타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런 기자 빼가기는 21세기 들어와서도 한동안 이어지면서 사세 약화에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11] 또한 1995년에는 석간신문이던 중앙일보가 조간신문으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었는데, 이때 한국일보가 "삼성의 광고를 잃어도 재벌 언론의 문제점을 비판하겠다"며 3월25일 ‘재벌의 언론파괴’라는 사설을 내보내 삼성그룹 산하의 언론사이던 중앙일보와의 전면전을 펼치기도 했다.

사주가 도박을 하다가 구속된 사건이 있는데 장재국 전 한국일보 회장이 회장 재직시절이던 1997년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큰 돈으로 도박을 하여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2002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다. 물론 이 신문사의 흑역사(...). 회장이 배임과 횡령 혐의로 구속 되었고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전통있는 신문사답게 이런저런 역사의 소용돌이에도 많이 휘말렸다.

신춘문예를 받는 곳중 하나고[12]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13], 미스코리아 대회의 주관사이기도 하다.[14] 1973년부터 창간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대한산악연맹과 공동으로 한국 에베레스트 등반계획을 세워 1977년 고상돈의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기여하기도 했다. 심지어 1969년부터 2016년까지 프로바둑기전 명인전을 주최한 바 있었다.

미주한국일보를 발행하고 있어 미국 한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유명한 신문이다. 미주한국일보와 같은 계열이 LA의 라디오 서울이다.

2012년 6월 17일 20000호가 발행되어 7월 19일 리셉션을 열었다.

경영 실적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창업주 장기영보다는 아들들의 역량이 좀 떨어지는 듯? 아들들의 역량이 너무 떨어져서 자본금까지 까먹고 있는 듯? 이 정도면 파산 준비해야 할텐데? 결국 이 문제로 사단이 났다. 장재구 회장의 배임의혹이 전면으로 드러난 것. 통신사인 뉴시스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으나, 아래의 사태 이후 머니투데이에 매각하였다.

장재국, 장재구 두 아들이 들어선 이후 사내의 분위기가 복잡하다. 자세한 것은 기사를 참조.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여담이지만 한국 언론 최초로 해외에 파견된 종군기자가 순직한 사건이 벌어진 언론사가 이곳이다. 진먼 포격전이 한창이던 1958년 9월 26일 최병우 기자가 다른 기자들과 함께 조난, 순직했으며 그의 이름은 진먼에 있는 충렬사에 안치되었다.

4. 역대 임원

4.1. 상임고문

  • 권혁승, 정태연 (1994~1998)
  • 김충한, 이인호, 정달영 (1998~1999)

4.2. 명예회장

4.3. 회장

  • 장강재 (1979~1989/1990~1993)
  • 장재국 (1993~1997/1998~2002)
  • 장재구 (1997~1998/2002~2013)
  • 회장대리 장재근 (1998)
  • 승명호 (2015~ )

4.4. 부회장

  • 홍유선, 신영수 (1981~1989)
  • 박병윤 (1999~2000)
  • 장재근 (2000~2002)
  • 이종승 (2011~2013)

4.5. 사장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73)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장강재 (1973~1979/1989~1990)
  • 홍유선 (1979~1981)
  • 장재구 (1981~1986)
  • 김창열 (1986~1989)
  • 장재국 (1990~1993/1999)
  • 장재근 (1993~1998)
  • 박병윤 (1998~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2015)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이준희 (2014~2015/2016~2019.12)
  • 이영성 (2020.1~ )

4.6. 수석부사장

  • 김영렬 (1996~2002)
  • 윤국병 (2002)

4.7. 부사장

  • 오종식 (1955~1957/1958~1960)
  • 성인기 (1961~1963)
  • 홍유선 (1968~1973/1978~1979)
  • 신영수 (1968~1973)
  • 윤동현 (1968)
  • 장강재 (1969~1973)
  • 김평윤 (1969~1978)
  • 장재국 (1979~1990)
  • 장재근 (1979~1993)
  • 김충한 (1983~1998)
  • 문은모 (1994~1998)
  • 문현석, 이성준 (1998~2002)
  • 신상석, 배봉휘 (2002~2003)
  • 정기상 (2003~2010)
  • 이상석 (2008~2011)
  • 이진희 (2013)
  • 이준희 (2013~2014)
  • 이영성 (2014~2019.12)

4.8. 대표 보전관리인

  • 고낙현 (2013~2014)

5. 역대 법정등록인

5.1. 발행인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73)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장강재 (1973~1981)
  • 홍유선 (1981~1985)
  • 장재구 (1985~1986)
  • 김창열 (1986~1989)
  • 장재국 (1989~1998/1999)
  • 박병윤 (1998~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5.12 ~ 2019.12)
  • 이영성 (2019.12 ~ 현재)

5.2. 편집인

  • 장기영 (1954~1962/1963~1964/1967~1969)
  • 남궁련 (1962~1963)
  • 김종규 (1964~1967)
  • 홍유선 (1969~1981)
  • 정태연 (1981~1982)
  • 권혁승 (1982~1985)
  • 김성우 (1985~1986)
  • 이문희 (1986~1998)
  • 이성준 (1998~2000)
  • 배기철 (2000~2002)
  • 신상석 (2002~2004)
  • 이종승 (2004~2011)
  • 이진희 (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6~2018.12)
  • 이영성 (2018.12 ~ 현재)

5.3. 인쇄인

  • 장기영 (1954~1969)
  • 조병종 (1969~1973)
  • 이기화 (1973~1987)
  • 이완준 (1987~1991)
  • 장재국 (1991~1993)
  • 장재근 (1993~1998)
  • 박병윤 (1998~1999)
  • 장재국 (1999)
  • 장명수 (1999~2002)
  • 윤국병 (2002)
  • 신상석 (2003~2004)
  • 이종승 (2004~2011)
  • 박진열 (2011/2013)
  • 이상석 (2011~2013)
  • 보전관리인 고낙현 (2013~2015)
  • 이준희 (2016~2019.12)
  • 권동형 (2019.12 ~ 현재)

6. 역대 주요 간부

6.1. 주필

  • 오종식 (1954~1957/1959)
  • 성인기 (1962~1963)
  • 홍유선 (1973~1978)
  • 주효민 (1978~1980)
  • 조두흠 (1986~1989)
  • 이문희 (1989~1990/1996~1997)
  • 오인환[15] (1990~1992)
  • 정달영 (1992~1994/1999~2000)
  • 김성우 (1994~1996)
  • 장명수 (1998~1999)
  • 노진환 (2002~2004)
  • 김수종 (2004~2005)
  • 임철순 (2006~2012)
  • 정병진 (2012.5 ~ 2015)
  • 이준희 (2015 ~ 2015.12)
  • 황영식 (2015.12 ~ 현재)

6.2. 논설고문

  • 주효민 (1980~1983)
  • 윤종현 (1983~1988)
  • 조두흠 (1989~1990)
  • 김성우 (1996~2000)
  • 임철순, 강병태 (2012.5 ~ ?)

6.3. 논설주간

  • 윤종현 (1980~1983)
  • 김창열 (1983~1986)

6.4. 논설위원실장

  • 김서웅 (1998)
  • 노진환 (2000~2002)
  • 문창재 (2002~2004)
  • 이준희 (2012.5 ~ ?)
  • 이계성 (2015.12 ~ 2017)
  • 황상진 (2017~현재)

6.5. 논설간사

  • 주효민 (1961~1963/1964~1973)
  • 신영철 (1963~1964)

6.6. 편집국장

  • 전홍진 (1954)
  • 오종식 (1954/1959)
  • 이건혁 (1954~1955)
  • 임창수 (1955~1958)
  • 홍승일 (1958/1959~1962)
  • 김현제 (1958~1959)
  • 장기영 (1962)
  • 장기봉 (1962~1963)
  • 홍유선 (1963~1971)
  • 이원홍 (1971~1974)
  • 김강환 (1974~1975)
  • 김창열 (1975~1978)
  • 조세형 (1978)
  • 권혁승 (1978~1980/1980~1982)
  • 심명보 (1980)
  • 조두흠 (1982~1983)
  • 김성우 (1983~1985)
  • 이성표 (1985~1986)
  • 이문희 (1986~1988)
  • 오인환 (1988~1990)
  • 정달영 (1990~1991)
  • 박병윤 (1991~1993)
  • 윤국병 (1993~1994)
  • 이성준 (1994~1996)
  • 김서웅 (1996~1998)
  • 배기철 (1998~1999)
  • 박무 (1999~2000)
  • 신상석 (2000~2002)
  • 최규식 (2002~2003)
  • 박진열 (2003~2004)
  • 임철순 (2004~2006)
  • 이진희 (2006~2007)
  • 이준희 (2007~2009)
  • 이종재 (2009~2011)
  • 이충재 (2011~2012)
  • 이영성 (2012~2013)
  • 이계성 (2013~2014)
  • 고재학 (2014~2015.12)
  • 황상진 (2015.12 ~ 2016)
  • 이성철 (2017~현재)

7. 역대 제호

한국일보 제호 변천사

1954년 창간 이후 1998년 가로쓰기 전환 전까지는 서예가 이미경이 쓴 제호를 상당 기간 동안 써왔다. 1998년 3월 16일 가로쓰기 실시와 동시에 쓴 제호는 국민대 조형대학 시각디자인학과 전승규 교수가 디자인하였으며,[16] 이 제호는 2001년 부분 변경을 거쳐 사용하다 2002년 3월 18일부터 헤드라인 계열 서체로 바꾸어 상당 기간을 쓰다가 2014년 동화기업 인수 이후 이듬해 6월 9일에 정사각형 배열로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8. 사옥

한국일보 구 사옥(종로구 중학동 14, 현 트윈 트리 타워)

창립 당시 중학동 사옥은 위 사진과는 달리 허름한 3층 건물이었다. 그러나 1968년 2월 27일에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이 자리에 7월 14일에 착공, 이듬해인 1969년 6월 4일에 위와 같은 지하 3층, 지상 13층짜리 사옥이 세워졌고, 1988년경에는 신관이 세워졌다.

건축학적으로 보면 1969년 6월에 준공한 한국일보 사옥은 건축가 故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걸작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철거되어 건축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17][18] 이후 한진그룹 본사 건물에 세들어 산다고 한다. 그 철거된 부지에 새 건물이 다 지어졌는데 김수근만큼은 못해도 나름 건축에 신경쓴 건물인 듯하다.# 그런데 한국일보가 이 건물에 들어갈 권리가 있었는데 포기했다.[19]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사옥 짓고 있다고...#

저 건물이 있던 시절에는 커다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社旗)가 게양되기도 하였는데 초대형급이라 바람에 날려도 쉽사리 휘날리지 않는 크기였다. 나중에는 사기와 함께 같은 크기의 태극기도 게양하였다. 허나 저 건물이 철거된 후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며 폐기 처분 되었는지 이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 후에 지을 신사옥에 게양할 일도 없을 듯 싶다. 참고로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옆자리에 별관 사옥도 있었는데 이 건물에는 작은 크기의 한국일보 사기가 게양되었다. 현재는 이 건물도 철거되어 없어진 상태.

참고로 이 건물이 철거되고 트윈 트리 건물이 들어선 이후로 그 동안 저 건물에 가려져있던 주한 일본대사관 건물 뒷모습이 경복궁 건너편 길가를 통해서 보여지기도 하였다. 트윈 트리 건물에는 주한 요르단 대사관이 상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9. 사가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나운영이 맡았으며, 1969년 9월 10일에 제정되었다.

(1절)찬란한 자유의 새벽을 나는 / 신념의 불사조 한국일보

곧고도 바른 붓끝으로 / 오늘의 역사를 증언하라

아아 생생한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서 / 시민의 눈이 되라 빛이 되라

(2절)세기의 물결을 힘차게 가르는 / 꿋꿋한 길잡이 한국일보

공정한 여론의 횃불을 들어 / 명랑한 사회의 불씨가 되라

아아 밝고도 구김없는 필진을 펴서 / 시민의 벗이 되라 빛이 되라

10. 홈페이지에 대해

본사의 홈페이지 역사는 우여곡절을 지녔다. 1996년 1월 16일에 본사 뉴미디어국이 개설한 '코리아링크(www.korealink.co.kr)'가 그 뿌리였다. 이후 1998년에 'www.hankookilbo.co.kr', 1999년 2월 15일에 'www.hk.co.kr'로 각각 바뀌었다가, 2000년 2월부터 뉴미디어본부가 'hk미디어'로 분사되고 5월부터 사명을 '한국아이닷컴'으로 바꾸면서 도메인도 같은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장재구 전 회장의 지분매각으로 관계가 꼬여서 한국아이닷컴을 운영하는 (주)인터넷한국일보 측이 본사와의 뉴스콘텐츠 공급 계약을 해지하여 본사 측은 2014년 5월 19일부터 한국일보닷컴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해 7월에 본사는 (주)인터넷한국일보를 상대로 '한국일보' 상호를 쓰지 못하도록 가처분 소송을 내 12월 11일부로 서울지법이 한국일보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인터넷한국일보 측은 상호명을 2015년 1월부터 '한국미디어네트워크'로 바꾸어야 했다.

11. 2013년 한국일보 사태

2013년 6월 15일, 사측이 용역업체를 동원해 기자들을 내쫓고 회사 방침에 따를 사람들만 출입을 허용해 복종을 강요함에 따라 직원과 사측이 치열하게 대치했다. 한편 이시각 그리스 ERT에서는

한국일보 노동조합은 1974년 언론자유투쟁 바람을 타고 한국노총 출판노조 산하로 설립된 바 있었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맞물려 일어난 언론민주화 운동에서 또다시 시작됐다.

한국일보의 논조 특성상 극렬한 노조는 아니었다. 하지만 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최근 해먹은(....) 200억을 가지고 노조가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하면서부터 회장이 인사에 개입을 했고, 이는 부당인사로 이어졌다. 결국 노조가 반발할 수밖에 없었고, 노조는 회사의 인사 조치를 거부하면서 신문을 정상적으로 제작해왔다. 그런데 한국 언론 사상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회장이 용역깡패들을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했다. 결국 일개 군소 지방지나 삼류 인터넷뉴스도 아닌 주제에 실제로 상당수의 내용을 연합뉴스통신사의 기사로 땜질했다. 심지어 사설도 연합뉴스의 연합시론의 것을 그대로 실었다(...) 그래서 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더군다나 사측의 편집국 폐쇄는 직장폐쇄로서, 엄연히 위법이다. 왜냐면, 직장폐쇄는 노조측이 파업을 할 때 이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 고용노동부 링크 즉, 기자들이 파업하지도 않았는데 사측에서 일방적으로 직장 폐쇄한 것은 요건부터 성립이 안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노동법상 파업의 성립 요건 자체가 사측에 상당히 유리하다. 그런 파업에 돌입도 하지 않았는데 직장 폐쇄라니 그것도 한국 정도의 민주주의 국가의 메이저 언론사라는 곳에서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노조측의 주장과 이야기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싫다에서도 들을수 있다. 에피35a 한국(퍼가염~♪)일보, 에피 35b 언론사 2종 벤치마크 - 한국일보 vs. 딴지일보

회사측에서는 SNS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일보의 트위터페이스북계정은 편집국의 일선 기자들이 개설해서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직장폐쇄 사태 이후 SNS에 소식이 빠르게 퍼졌다.

결국 법원에서 한국일보에 재산보전 처분을 내리면서 장재구 회장은 경영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그와 동시에 한국일보는 보전관리인으로 우리은행 출신 고낙현을 내세워 법정관리를 받게 되면서 한국일보 사태는 막을 내렸다. 하지만 구 편집부와 신 편집부 사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가 과제가 되었다.

12. 2014년 이후

2014년 2월 24일 삼화제분에 인수될 뻔했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다시 인수 절차가 진행되었고, 9월 18일 동화기업이 우선협상자로 선정되었다.

아직 법정관리 상태이긴 하지만, 장재구 회장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신문 발행은 빠르게 정상화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회생절차 직전 구성원들 몰래 인터넷한국일보(현 한국미디어네트워크) 지분 50%를 매각하면서(...) 이쪽과는 남남이 되었고, 한국일보는 결국 온라인부문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자세한 사정은 여기에. 이와 함께 온라인 부문(한국일보닷컴)에 크게 투자하며 다양한 시도를 통해 예전 한국일보의 명성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 새 사옥의 첫 을 떴다. 기사 2014년 11월 3일 동화기업과 M&A를 체결했으며 2015년 1월 9일 동화기업에 인수되었다. 6월 9일부로 기존의 "▶◀" 로고를 버리고 새 로고를 만들었다.

2015년 6월, 메르스 대란이 한창일 때 삼성서울병원 소속 의사가 뇌사상태라고[20] 오보를 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페미니즘 성향이기는 하지만, 메갈리아, 워마드, 트페미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적인 성향이다. 이 기사에서도 일베메갈리아를 혐오 담론이 오가는 커뮤니티로 규정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링크

특히 갓건배 관련 이슈에 대해 갓건배의 패륜적인 발언은 언급하지 않고 선량한 피해자인 것처럼 편파 보도를 했던 여타 진보 언론과는 달리 여혐 콘텐츠와 남혐 콘텐츠의 문제점을 모두 자세하게 짚었으며, 이러한 혐오 콘텐츠들이 근절되지 않는 시스템적인 문제점을 짚었다. 링크 또, 한서희에 대해서도 페미니즘을 악용해 마케팅을 한다고 비판했다. 링크

그러나 박진성 시인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의혹이 거짓이었음이 2017년에 밝혀진 뒤에도 오랫동안 정정보도를 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2019년 1월에야 인신모독적 오보에 대한 정정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사죄, 사과, 하다못해 유감이란 표현조차 전혀 나오지 않았고, 올린 시간은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0시 2분인 등 여전히 치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어 역시나 기레기답다는 댓글이 많다.

2017년 말기 들어 황수현 기자 사건(링크), 남도현 기자 기사 제목 논란(12월 11일 기사 링크), 김광수 기자 내로남불 기사 논란 등이 터졌다. 후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韓中 국방 핫라인 가동도 초읽기라고 좋게 기사를 쓴 김광수 기자가 2017년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중 외교에 대해 핫라인? 수화기 안 들면 그만(아카이브)이라고 정반대 논조로 기사를 쓴 일이다. 물론 2017년 기사에서 2015년에 한중 핫라인이 개설됐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고 결국 박근혜 정부가 사드를 설치했다는 언급은 하는데 겨우 2년 전에 좋게 기사를 쓴 인물과 동일인물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는 수준이다. 게다가 명백한 조롱성 서술("아빠가 기껏 사다 준 네발 자전거를 창고에 처박아 놓고는 두발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누비겠다는 철부지 아이와 영락없이 닮았다.")은 좀...

논란이 되자 제목을 한중 핫라인 개설, 갈 길이 멀다.로 고치고 문제의 구절도 없앴지만 이미 변경 전 제목과 내용이 알려지고 아카이브로 박제된 지 오래다. 중도를 지향하는 한국일보치고 너무 적나라해서 일부에서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가 중국 갔다가 맞은 것에 대한 시위 아니었겠냐고 분석했다.

그런 와중에도 2018년 7월에 장자연 사건 진술조서 전문을 단독 공개하였다.

게다가 2020년 1월 20일 팩트체크 없이 유튜브에서 한국 남성들이 여자 배설물 닦는 모습 검색어를 많이 검색하는 음란한 족속이라는 내용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기사를 실은 적이 있는데(@), 사실 여쭉메웜 혹은 트페미로 추정되는 익명의 판녀가(@) 주작글로 남성혐오를 선동하기 위해 다른 페미들과 검색어를 조작해서 선동글을 올렸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1@1#2@2#3@3). 이처럼 겉으로 극단적인 페미니즘 사이트를 멀리한다고 하여도 그들의 여론조작으로 이루어진 주장을 곧이 곧대로 싣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13. 기획·특집

13.1. 기획

13.2. 연재

14. 관련 문서


  1. [1] 2015년 5월 말 와이즈빌딩(구 YTN타워) 16 ~ 18층으로 이전하였다. 원래는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근처에 있었으나, 구 본사 건물이 철거되고 2015년까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118 한진빌딩 신관 12층을 사용했었다.
  2. [2] 동화기업 60.04% 동화엠파크 39.96%로 동화그룹에서 100% 소유하고 있다.
  3. [3] 현 홈페이지와는 별개로 한국아이닷컴도 있다. 자세한 사연은 아래에 후술.
  4. [4] 한국일보의 창업주
  5. [5] 다만 미주판과 MBN의 아침 & 매일경제 프로그램에서 해당 신문사 기사를 내보낼 때 자막으로 계속 사용하고 있다.
  6. [6] 실제로 내부 기자들의 기자수첩이나 논설위원들의 기명 칼럼들 사이의 논조 차이가 크고, 심지어는 외부 기고 칼럼들 사이의 논조 차이도 크다.
  7. [7] 이 또한 한국일보 특유의 중도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 정치부의 기사는 어떻게든 매체의 정치적 논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 그리고 과거 한국일보가 한창 잘 나가던 과거 7,80년대 시절만 해도, 정치부나 경제부 기자보다는 사회부 기자야말로 진짜 실력있는 기자라는 의식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한국일보 출신의 사회부 기자들이 여러 다른 매체로 이직을 하며 중간 간부로서 기틀을 잡으면서 이런 평판을 형성할 수 있었다. 사회부 기자들이 딱히 각광받기 힘들어진 현재에 와서는 과거의 명성이 퇴색된 측면이 있다.
  8. [8] 이때 신문사들 간의 증면 경쟁이 어찌나 막무가내였던지, 심지어 신문용지의 공급이 모자라서 신문을 찍지 못하는 기절초풍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9. [9] 한국일보 창간 4년 전에 세워진 독립법인이었으나 1953년에 장기영이 인수하였다.
  10. [10] 2013년부터 한국미디어네트워크에 인수됨.
  11. [11] 다만 동양방송이 한창 개국했을때는 한국일보에서 동양방송에게 뉴스를 제공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것도 초창기의 일.
  12. [12] 유명한 인물이 소설가 최인호이다.
  13. [13] 봉황대기 대회는 2010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가 2013년 부활했다. 2010년 고교 야구부에 참가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확실한 내용 추가바람.
  14. [14] 이 때문에 미스코리아 대회 상 중에 "미스 한국일보"가 있다.
  15. [15] 김영삼 정부 때 공보처장관을 역임함.
  16. [16] 출처: <한국일보 50년사> p1097.
  17. [17] 재개발하고 고층 빌딩이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해당된다.
  18. [18] 혹자는 이에 대해서 한국 건축계의 이중적인 태도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광화문 앞의 정부중앙청사나 김수근의 한국일보 사옥이나 고궁 앞에 위치하고 있고 수직적이고 위압적인 외견을 가지고 있는데 정부중앙청사에 대해선 엄청난 비난이 쏟아지는 반면 김수근의 한국일보 사옥에 대해선 찬양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19. [19] 한국일보가 그 권리를 포기한건 아래에 나오는 한국일보 사태와도 연관이 있다.
  20. [20] 현재 기사는 수정됨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Contents from Namu Wiki

Contact - 미러 (Namu)는 나무 위키의 표가 깨지는게 안타까워 만들어진 사이트입니다. (151.86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