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S. 트루먼

  1998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에 대한 내용은 트루먼 쇼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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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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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제임스 먼로

존 퀸시 애덤스

앤드루 잭슨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윌리엄 해리슨

존 타일러

제임스 포크

재커리 테일러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밀러드 필모어

프랭클린 피어스

제임스 뷰캐넌

에이브러햄 링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앤드루 존슨

율리시스 S. 그랜트

러더퍼드 B. 헤이스

제임스 가필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체스터 A. 아서

그로버 클리블랜드

벤저민 해리슨

그로버 클리블랜드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윌리엄 매킨리

시어도어 루스벨트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우드로 윌슨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해리 S. 트루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F. 케네디

린든 B. 존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제45대

도널드 트럼프

※ 22.24대 미합중국 대통령인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한차례 건너뛰고 연임한 사례의 대통령이다.

}}}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주요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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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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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에런 버

조지 클린턴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엘브리지 게리

대니얼 D. 톰킨스

존 C. 컬훈

마틴 밴 뷰런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리처드 M. 존슨

존 타일러

조지 M. 댈러스

밀러드 필모어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윌리엄 R. 킹

존 C. 브레킨리지

해니벌 햄린

앤드루 존슨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스카일러 콜팩스

헨리 윌슨

윌리엄 A. 휠러

체스터 아서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토머스 A. 헨드릭스

리바이 P. 모턴

애들레이 E. 스티븐슨

개릿 A. 호바트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찰스 W. 페어뱅크스

제임스 S. 셔먼

토머스 R. 마셜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캘빈 쿨리지

찰스 G. 도스

찰스 커티스

존 N. 가너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헨리 A. 월리스

해리 S. 트루먼

앨번 W. 바클리

리처드 닉슨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린든 B. 존슨

허버트 H. 험프리

스피로 애그뉴

제럴드 포드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넬슨 록펠러

월터 먼데일

조지 H. W. 부시

댄 퀘일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앨 고어

딕 체니

조 바이든

마이크 펜스

}}} }}}}}}||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미국

영국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조지 6세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중화민국

소련

 

린썬

장제스

미하일 칼리닌

이오시프 스탈린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주요 수훈과 수상


Congressional Gold Medal
의회 명예 황금 훈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마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우즈 2세
대위 에드워드 맥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톤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컵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즈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의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던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데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우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자레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란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콤

중위 데이빗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사무엘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대령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즈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들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스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란시스 퀸

윌리엄 시노트

1942년

1945년

1946년

롤랜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멤버들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미합중국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미합중국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들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마스 안소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미합중국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C.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호레이쇼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마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나탄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렌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테오도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먼로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 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쉘튼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로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br[ 해리 & 엘리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14대 달라이 라마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산수지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브룩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서비스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100연대 보병 대대
442 연대 전투단
군사 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대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으로 사망한 남녀들

라울 발렌베리

애디 매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롤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들

미국의 공군 에이스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들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들

OSS

2017년

밥 돌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重章)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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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규

김구

김규식

김좌진

김창숙

더글러스 맥아더

민영환

박정희

필립 제이슨

손병희

신익희

쑨원

쑹메이링

안중근

안창호

여운형

오동진

윤봉길

이강년

이승만

이승훈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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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장제스

조만식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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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치메이

최익현

트루먼

밴 플리트

한용운

허위

응오딘지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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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4대 부통령}}}

미합중국 제33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
Harry S. Tr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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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

출생

<colcolor=#000000> 1884년 5월 8일

미국 미주리 주 라마

사망

1972년 12월 26일 (88세)

미국 미주리 주 캔자스 시티

국적

미국

직업

정치인, 군인, 판사

재임기간

제34대 부통령

1945년 1월 20일 ~ 1945년 4월 12일

제33대 대통령

1945년 4월 12일 ~ 1953년 1월 20일[1][2]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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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엘리자베스 트루먼 (1919년 결혼)

자녀

마거릿 트루먼

종교

개신교(침례회)

학력

인디펜던스 고등학교[3] (졸업)
스팔딩 상과대학교[4] (중퇴)
캔자스시티 대학교 법학대학원[5] (중퇴)

신장

172cm[6]

정당

[[민주당(미국)|{{{#!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A6EF; font-size: .8em"

민주당}}}]]

주요 경력

매사추세츠 주 의회 상원의장
제46대 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제49대 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제29대 미국 부통령
제30대 미국 대통령

}}}}}}}}}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어린 시절
3.2. 제1차 세계대전
3.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
3.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3.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4. 평가
4.1. 서방세계의 평가
4.2. 한국 내의 평가
4.3. 일본 내의 평가
4.4. 당시 공산진영의 평가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
7. 관련 문서

1. 개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The buck stops here!)[7]

- 대통령 재임 중 책상 위에 놓은 명패에 적힌 글

미국의 33대 대통령. 그의 전임자 FDR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 부통령이 된지 82일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앤드루 잭슨의 뒤를 이어 평범한 사람도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재임 당시에는 미국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전임자 루스벨트와 전쟁 영웅인 후임자 아이젠하워의 카리스마에 가려 평범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서 냉전기로 이어지는 급격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냉철한 판단력으로 전후 질서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 평가받으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대표적인 대통령이다.

일전까지 대통령 한 명 나오지 않았던 '깡촌' 미주리 출신에, 미국 역사상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다. 제럴드 포드와 더불어 초임 '러닝메이트'가 아닌 후임자 부통령, 대통령직 승계, 재임 당시의 낮은 인기 등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중서부 출신은 이 둘밖에 없다. 다만 트루먼은 제럴드 포드와 달리 재선에도 성공했고, 여러가지 주요한 결정들을 통해 미국 역사, 더 나아가 세계사에도 크게 한 획을 그었다는 차이가 있다.

2. 이름

퍼스트 네임인 해리는 해리 S. 트루먼의 외삼촌이자 어머니 마사 엘런 영 트루먼(Martha Ellen Young Truman)의 오빠인 해리슨 "해리" 영(Harrison "Harry" Young)에게서 따왔다. 외삼촌은 해리슨이 정식 이름이고 해리는 애칭이었지만, 해리 S. 트루먼은 해리 자체가 정식 이름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친필 서명. 미들네임 S 뒤의 점이 선명하다.

트루먼의 미들 네임은 그냥 S.이다. 그의 친할아버지 앤더슨 십 트루먼(Anderson Shipp Truman)과 외할아버지 솔로몬 영(Solomon Young)의 이름을 동시에 따왔기 때문이다.[8] 일반적으로 미들네임이 알파벳 한 글자인 경우 구두점을 찍지 않지만, 트루먼 본인은 공문서나 조약 등에 서명할 때는 분명히 'Harry S. Truman'이라고 적었으며 자서전에도 미들네임 뒤에 점을 찍어 본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표기할 때에도 그를 존중하여 S 뒤에 점을 찍어 표기한다.

이름을 두고 트루먼은 "할아버지가 내 출생신고를 하면서 서류 위에 국수 한가닥을 흘렸어."라고 농담하거나,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식 선서를 진행한 할런 F. 스톤(Harlan Fiske Stone) 연방대법원장은 트루먼의 풀네임을 오해하여 그에게 "나 해리 십 트루먼은(I, Harry Shipp Truman)"이라고 따라 말하게 시켰는데 트루먼 본인은 알아서 "나 해리 S. 트루먼은(I, Harry S. Truman)"으로 고쳐서 선서한 일화가 있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1897년 사진.

미주리 주 러마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안경을 쓰게 된 것도 너무 책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서 근시가 되어 버렸는데 역사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본인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지독한 근시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우드로 윌슨과 함께 안경이 두드러지는 대통령이 되었다.[9]

3.2. 제1차 세계대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시절에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는데 군 복무도 2차례 했었다. 먼저 1905년부터 1911년까지 6년간 미주리주 주방위군에 자원하여 포병 상병으로 제대했고, 2번째로 1917년~1919년의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자 트루먼은 지독한 근시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통과하였다.[10] 이렇게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육군 포병 장교로 복무하였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육군 복무 경력은 대략 8년. 그리고 트루먼의 부대는 종전이 선언되는 그날까지 독일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차대전의 마지막 교전에 참전한 부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게 그라는 걸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3.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소꿉친구였던 베스 윌리스와 결혼을 하고 양복점을 경영했지만 얼마 못 가서 말아먹었다. 이후 30대에 캔자스시티 법률학교를 졸업하여[11]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지역 판사(겸 서기)로 일했으며 1934년 연방 미주리주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계속 재선해서 2차대전 당시엔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일명 트루먼 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로 군납비리에 대해 군대와 산업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펼쳐 당시의 물가기준으로 약 150억 달러의 국고를 보존할 수 있었고 미군에 납품되는 물자, 병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확립했고 이러한 업적은 오늘날까지 미군과 군수산업계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상원의원 활동 때에도 그저 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하지도 않는 무난한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이 된 과정이 좀 무섭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헨리 A. 월리스가 루스벨트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4선 선거(1944)에서는 부통령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 때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가 트루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것이 예상치 못한 사건은 아니었다. 1944년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미 정가 고위층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민주당 중진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트루먼을 뽑은 것이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능력도 없어보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사후 자기들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루스벨트가 트루먼을 부통령직에 앉히는데 동의한 까닭은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4선을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가 트루먼을 선택하는 데 동의한 이유는 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뉴딜 정책을 옹호하는 유일한 후보자였기 때문이었다.[12] 하지만 그는 월리스가 스스로 자력으로 치고 나온다면 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고, 트루먼에 그의 의중이 있다는 것은 월리스를 경계하는 정객들에게 더욱 과대포장된 감이 있었다. 여하간 모든 것은 정객들의 계산에 들었고, 루스벨트도 크게 마음에 안 들진 않았고, 월리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13]

그리고 과연, 3개월만인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죽자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트루먼은 이 소식을 하원의원들과 술마시다 받았다고 한다.[14] 물론 여기서 술마셨다는 것은 놀러가서 마신건 아니고 민주당 의원들과의 공식 미팅에 정부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자리이긴 했다. 그리고 미팅 중에 급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투덜거리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더니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첫 마디가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였다고 한다.

엘리너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부통령님께 무엇을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15]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라고 소감을 밝혔다.

3.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ㅡ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비판하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트루먼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취임 이후에 처음 보고받았다. 원래 부통령으로써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해야 했지만, 루스벨트 생전에는 루스벨트의 영부인이 트루먼의 프로젝트 접근을 의도적으로 차단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마셜 플랜 등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는 못해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토마스 듀이 후보가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16] 16년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약이 오른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여권분열이 일어나면서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했으며, 실제로 3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더불어 월리스도 진보당으로 나왔다.

트루먼은 패배를 예감하고 대통령 선거 전날에 자신의 패배를 예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대선 당시 듀이는 자신의 인기를 과신했고, 미리 각료를 구성하거나 뱃놀이나 벌였으며, 트루먼의 지지율이 최악이었던 것에 자만한 나머지 선거 유세도 제대로 안 하는 비범함을 자랑했다. 실제로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에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었다. 하지만 후대에 들어서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갤럽>의 여론조사는 <갤럽>의 삽질이었다는 시각도 나타났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간 1936년 루즈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대박을 친 <갤럽>은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겼다.[17][18] 1948년 선거에서 <갤럽>의 저지른 잘못된 여론 지지율 조사방식은 이후 통계학개론 강의 등에서 적절한 표본집단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써먹히게 된다.

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대놓고 박제인실좆의 현실례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그로부터 59년 뒤인 2007년, 시카고 트리뷴은 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실수를 덤덤하게 회고했다. # 사실 시카고 트리뷴만 이런 건 아니고, 라이프지를 비롯한 여러 언론도 듀이를 '차기 대통령'이라고 표기한 사진 등을 내놓았다.

3.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나는 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짤랐다. 그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짜른게 아니다. 물론 그가 그렇긴 했는데, 그게 불법은 아니니까. 만약 그게 불법이었으면, 장군들의 절반 혹은 3/4 정도는 다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s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 중 트루먼이 1960년에 했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트루먼의 대통령 제 2 임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교적 사건은 역시 6.25 전쟁이다. 보통, 특히 밀리터리 쪽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의 마찰이 유명하다. 애시당초 둘은 성격이나 정치사상부터가 달랐고, 트루먼은 쇼맨십이 강한 맥아더의 행동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 말 안 듣고 혼자 설쳐대는 맥아더를 보고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을 정도니... 그래도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딱히 제재를 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6.25 전쟁 개입으로 맥아더 원수가 "핵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자 트루먼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냥 핵 한 발이 아니라, 만주중국 본토, 한반도에 수십 여발! 이런 맥아더를 보자 평소의 악감정에 더해서 또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트루먼은 결국 그를 해임시켜버리고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맥아더의 핵 투하를 반대한 탓에 중공군이 개입해서 한국이 통일을 못 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만일 맥아더의 주장대로 핵을 떨어뜨렸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이다. 6.25 전쟁의 참전국만 봐도 강대국 간의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나올 정도이기 때문.[19] 물론 방사능의 여파도 심각하다.[20] 이러면 통일이 되어도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당시는 미국만 핵을 가졌으므로 3차대전이 벌어지더라도 승리했겠지만 어마어마한 인명피해와 후폭풍이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계획에 사용되는 핵폭탄의 개수가 핵 한두 개가 아니라 핵폭탄 20여 개 및 방사능 폐기물들을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투하하여 중공군이 지나갈 수 없도록 방사능 오염 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 한반도는 3면은 바다, 한 면은 방사능 지대, 아니 3면이 방사능 지대[21], 한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지옥이 된다![22] 말 그대로 이후 문제는 고려않고 순전히 '이기기 위한' 계획이였던 것.

그런 점에서 보면 트루먼은 단순한 서방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라 좁게는 자국민을, 좀 더 넒게는 한반도를 파멸의 위협에서 구해낸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것과 6.25 전쟁의 개입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23]

이외에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에 발족했다.

3.5.1. 해군과의 불화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친공군적 성향[24] 때문에 타군, 특히 해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전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되려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고 징징대는 영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어차피 2차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25][26] 이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장관 시절부터 육군/해군부를 통합하는 안에 기겁하던 것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여 겨우 진정시켰던 것이고, 트루먼이 하도 공군을 좋아하며 해군을 등한시하자 1948년 대선에서 제임스 듀이 공화당 대선후보와 비밀리에 짝짜꿍을 했다가 선거 몇주 전 그 일이 들통나서 트루먼이 재선 후 2기 내각을 구성할 때 해임해버렸다.

제2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육군 예비역 법무대위 출신으로,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해군이 핵무기 운용이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폭격기를 운용하기 위해 기획했던 초거대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함을 건조 시작 5일만에 취소시켜버리자 급기야 참고 참아왔던 해군 제독들이 폭발했다. 오늘날에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으로, 존 설리번 해군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대장 루이스 덴펠드 제독, 해군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수많은 제독들이 불명예 제대까지 각오하고 국방부에 항명했으며, 5월에는 포레스탈 前 장관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7] 그러자 존슨 장관은 해군에게 염장지르듯이 "앞으로 상륙작전 같은거 없을거니 해병대 필요 없다. 해군이 할 일은 공군이 하면 되니까 해군도 필요 없다." 같은 말을 해버렸다. 참고로 1949년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게 하반기에 세계에 알려지자 핵무기 무턱대고 쓰다간 인류멸망이 온다는 공포 속에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조명되던 참이었고 루이스 존슨 장관이 저 말을 한건 12월이었다.

사태가 악화되던 1950년 6월 말에 6.25 전쟁이 벌어졌고, 미군이 참전하여 해군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해병대, 그리고 무엇보다 해군/해병 항공대의 맹활약을 통해 그런 해군 무용론이 버로우탔지만 오랫동안 이들의 갈등은 남아있었고, 베트남 전쟁 등을 거쳐서야 그 갈등이 조금씩 중화되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이니 6.25 전쟁이니 하는 마당에 집안싸움까지 벌어지던 국방부의 혼란을 도저히 붙잡기 힘들게 되었고, 존슨 장관의 후임으로 육군원수 조지 C. 마셜 장군이 임명되는 초강수가 나와야 했다. 마셜 장군이 현역 군인 신분[28]으로 국무장관에 재직하며 마셜 플랜도 실행했던 경력이 있고 국방부와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문민통제를 위반하는 인선이라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국방부가 더욱 혼란해질 것을 걱정한 상원에서 마셜 장군의 국방장관 임명을 특례로 승인했다.

마셜 장군은 건강 문제로 짧게 재임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6.25 전쟁과 역시 육군 원수 출신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백악관행이 겹치며 마찰은 점점 중화되었고, 오늘날 미 국방부는 예산 편성만 보면 여전히 해방부이긴 하지만 각 군별로 균형이 잘 맞게 배정되어 있으며 협력체계도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훗날 니미츠급 항공모함 8번함 CVN-75가 이 대통령의 이름을 땄는데, 하필이면 이 배의 원래 이름이 바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29] 그래서 미 해군에서는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두 번 죽였다'고 수근댔다고 한다.

4. 평가

4.1. 서방세계의 평가

[30]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순위에서는 5위에서 9위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으며, 평균 7위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통령이다. (2017년에 CBS(미국 방송)에서 91명의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는 6위로 순위가 책정되었다.#

전반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이 훌륭한 편이다.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 조사나 업적 평가를 하면 항상 10위권 내에 들며 우수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전임자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지만, 대통령 자리에 오른 후 제2차 세계대전 종결과 전후 질서 확립, 그리고 뒤이어 나타난 소련 공산주의의 공격적인 팽창에 대응하여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서 침착하게 세계 질서를 이끌었고, 냉전과 6.25 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의 지도국가로 굳힌 점이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소련이 스스로 무너진 이후 트루먼의 정책이 냉전의 평화로운 종결과 냉전 후 미국의 헤게모니에 큰 기여를 했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언변이 정치인치고는 능숙한 편이 아니라서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할 때에는 야유를 받는 굴욕까지 당했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소도시, 지역 마을을 돌았다. 서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거의 유럽에 돈을 퍼붓다시피 한 마셜 플랜으로 인해 욕도 많이 먹었다. 특히 1953년 1월에 트루먼이 퇴임하여 고향 미주리로 돌아갈 때는 그 뒤에 대고 욕설을 퍼부은 국민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가 3선에 나서지 않고 한달반 일찍 퇴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31]

대통령 재임 중에는 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근면,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나 위에 나온 그의 좌우명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 따른 강건한 책임의식이 그가 높이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 '재임 중에 욕을 먹지만 퇴임 후 찬양받는' 전형적인 케이스. 그의 미들네임 S를 따서 3S라고도 한다. Stubbornness(고집), Sympathy(동정심), Stoicism(인내[32]).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그를 좋아했으며 철의 장막도 처칠이 트루먼의 모교(인디펜던스 고등학교[33])를 찾아가서 한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34] 처칠은 처음에는 FDR 대신 대통령이 된 그를 못 미더워했으나 나중에는 다른 어떤 누구보다도 "서방 세계를 구했다"며 극찬했다. 또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도 처음에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만큼 중국에 관심을 줄지, 그리고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유약한 인물이 아닐까 우려했지만 그의 기질을 높이 평가한다.

CNN래리 킹은 그를 "매혹적인 언변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고,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트루먼에게는 리더의 최대 걸림돌인 교만이 없었다. 그와 그의 일 사이에는 한 번도 사적인 자존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2년 12월에 그가 88세로 사망했을 때 칼럼리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트루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도 예술가도 체스 선수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고 실수도 하고 어떨 때는 예기치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이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4.2. 한국 내의 평가

한국에서의 평가는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좌파 쪽에서는 공산권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펼쳐진 민족운동 탄압의 이미지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우파 쪽도 좋지는 않았는데, 김일성을 자극한 애치슨 라인 설정과 맥아더의 주장대로 산둥반도와 만주에 핵을 쐈으면 6.25 전쟁을 북진통일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이 1990년대까지 자주 들리던 레퍼토리였다. 심지어 맥아더가 6.25에서 승리하면 맥아더의 인기가 높아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맥아더를 자르고 본인도 다음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것이라는 원색적인 미국발 극단주의적 비난까지 있었다.[35] 그러니까, 좌파 우파 가리지 않고 양측 입장 모두에서 비판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어느 쪽에 휩쓸리지 않고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물론 절대다수에게 비난받던 정도는 아니었다. 교민들 사이에서는 도리어 소식을 듣자마자 "개새끼들, 당장 파병해!"라고 하고 바로 파병해 줘 고마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트루먼이 사망하자 1972년 12월 28일을 애도일로 선포하고 하루 동안 조기를 게양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그의 성 트루먼(Truman=True+Man)을 한역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바다를 건너와 백성들을 구하는 진인(眞人)이 바로 이 사람이라는 해석이 나왔을 정도. 정확한 인용은 다음의 대목으로, 군통수권자로서 의회 승인과 관계 없이 미군을 파병했다.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다음 단계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36]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퇴임 후의 트루먼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과의 만남에서 트루먼은 손수 커피를 끓여주며 채명신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채명신이 한국민과 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하자 본인 역시 승전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받으면서 당시 백악관의 상황과 결정이 상세히 기록된 자신의 일기를 직접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수첩에는 본인이 군통수권자의 직권으로 미군을 파병한 흔적이 부대별로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고는 문득 채명신에게 "내가 맥아더를 경질한 것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듣고 싶군요."라고 물었다고. 이에 채명신은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의 정치적 관계[37]를 고려해서 “한국민들은 맥아더의 해임 이유를 모르고 그가 그저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훌륭한 장군이라 믿지만 저는 압록강 전선에서의 후퇴에 분명 맥아더의 판단 착오[38]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고, 공과 과에 대한 평가를 적절히 섞은 채명신의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엔 작전상 중대한 과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던 트루먼은 궁극적인 목표[39]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관철을 위해 당시 상황의 균형[40]을 먼저 선택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원론적인 육참골단의 전략을 내세운 것이다.

종종 극단적 매카시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던 군인 맥아더는 극동에서의 확전을 불사하고도 공산주의 사상의 궤멸을 목표로 삼아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판단한 반면, 트루먼은 이념적, 외교적 이해관계를 연결적으로 분석하는 정치가적인 성향을 토대로 제한전쟁의 성격을 가지는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결론을 맺어야 하고, 재확전과 경쟁적 핵무장이 이루어지기 전에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국제정치적으로도, 이데올로기적 균형을 위해서도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부터 여러 연구를 통해 업적이 평가되어 이제는 한국을 구원한 사람으로 맥아더와 함께 알려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여러 전략적 전술적인 실수[41]와 지나친 확증편향[42]이 다방면에서 객관적으로 연구되는 측면도 있고 냉전 초기의 트루먼의 전략적 결정이 가지는 국제정치적 가치가 평가되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4.3. 일본 내의 평가

맥아더를 향한 한일 양국의 평가는 공통적으로 긍정적이지만, 트루먼을 향한 한일 양국의 평가는 극도로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일본내에서는 당시 일본의 입장을 적극 반영돼 트루먼이 원자폭탄 투하 최종명령으로 천황을 굴복시킴과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피해를 불러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의 항복 이후에도 끈질기게 전쟁을 이끌었던 일본에게 패전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원자폭탄이라는 희대의 수단을 사용하여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원흉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천황의 권한을 완전히 떨어뜨려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한, 거기에 더해 일본 미군정을 통해서 전후 일본에게 악의적 제재를 가해온 대통령으로 평가된다.[43] 동시에 일본 우익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꿈꾼 시절을 완전히 단절시킨 철천지 원흉격에 속하기도 하겠다. 구 일본군 입장에서도 보면 국방군을 현재의 방위급 자위대로 격하하게 만들었던 주 원인으로 지목되는 편.[44]

그러나 사실은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냥 몰락 작전을 강행해서 일본을 지구상에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 테니, 원자탄 투하로 감지덕지해야 하는 판이다.[45][46]

4.4. 당시 공산진영의 평가

북한의 입장에서는 김일성과 간접적으로 대적한 원흉이자 6.25 전쟁 때 자국병들을 파병하여 자신들의 남침을 좌절시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남한 및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방해하고 좌절시킨 원흉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입장에서 주적이자 원흉으로 불리우는 미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1949년 남한에 있는 주한미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을 때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당연히 미국군이라는 방해꾼에 골칫거리가 없어지면 남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 후 이 철수 때문에 남한이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서 위기에 처하자 트루먼이 대통령 자격으로 미국의 우방인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남한에 미군 전투병력을 파병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다시 원수지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에서도 평가가 그리 좋지는 않다. 종전 직전까지만 했어도 소련의 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머리를 맞대고 추축국 소탕에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종전 이후 냉전기에 접어들고 한반도 문제까지 겹쳐서 그 당시 미국과 사이가 적대적이었던 입장에서 좋게 평가받은 인물은 아니었다. 또 6.25 전쟁 때 미국군의 파병 명령을 내리게 된 장본인이기도 하여서 북한과 함께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했던 걸림돌이자 원흉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및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후 1950년 6.25 전쟁 때 중국군 인해전술을 무력화한 계기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과거 중화민국 시절 장제스 정권 때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연합국으로써 추축국 일본을 크게 무찌른 영웅 동료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해리 트루먼이야 말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워누(일본 비하 명칭)놈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일본 열도를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몰락 작전이 진짜로 실행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더욱 발전하게 되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는 중국 극단주의자들도 있다. 실제 중국에서 반미 감정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리 트루먼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47]

5. 여담

당신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황이고, 당신이 일자리를 잃으면 공황이다.(It's a recession when your neighbor loses his job; it's a depression when you lose yours)[48]

개새끼!(Son of a bitch!)

- 입버릇처럼 달고 산 말

  • 20세기 유일한, 그리고 미국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고, 아마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49][50]
  • 소꿉친구와 결혼해서 백년해로한 인물인데 영부인 베스 트루먼을 6세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며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 사귀었는데 둘의 결혼은 트루먼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1919년(35세)에야 이루어졌다. 결혼 전인 1910년부터 1959년까지 부부는 매번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이 편지를 따로 묶은 서간첩인 <Dear Bess>(베스에게)가 따로 책으로 나왔을 정도이다. 이 서간첩은 576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거릿뿐이었지만 트루먼이 만난 지 84년만인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했다. 베스 트루먼은 남편이 죽은 지 딱 10년 뒤인 1982년 영면했다. 덧붙여 베스 트루먼은 2015년 현재 역대 미국 영부인 중 가장 장수한 영부인이다.(97세 247일)
  • 그 밖에도 전쟁 말기에 베트남호치민으로부터 "독립 후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어디 촌구석에서 날아온 편지따위는 신경도 안썼다.
  •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백인 하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인데, 하딩의 one drop rule에 따르면 흑인인 연고로 인해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하딩 흑인설도 이미 망한 떡밥이라.
  • 참고로 KKK 멤버이기도 했었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사실을 상당히 부끄러워 했다. 본인 말로는 1924년에 미주리주 잭슨 카운티의 판사에 재선에 성공하게 되면서, 당시 잭슨 카운티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KKK의 제안을 받아 한 번 참석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일단 10달러를 주고 가입했다고는 하나, 공개적으로 활동하진 않았다고 하며, 본인 스스로 당시 이야기를 말하는걸 꺼렸다고 한다.
  • 독서는 죽을 때까지도 즐겨서 은퇴 후 70대에 들어서도 어떤 기자가 트루먼의 자택을 찾자 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기자가 "대통령께서는 주무시려고 책들을 읽으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아니오. 깨어 있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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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 바콜과 피아노를 치는 트루먼.

의외로 피아노가 취미였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던 듯. 당시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인 로렌 바콜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치는 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본 트루먼의 친구가 "자네 그 사진보고 마누라가 뭐라 안하던가?"라고 묻자 트루먼은 "집사람이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피아노 등을) 연주하는 거나 노는 거나 둘 다 to play다. 이를 이용해 트루먼이 말장난을 한 것이다.
  • 당대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자서전도 있다. 오늘날에는 2차대전 말기와 냉전에 관한 정책적 결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는데. 자서전답지 않게 의외로 진솔하고 책임질 일은 확실히 책임지고 있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맥아더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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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임진각에 트루먼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이는 한국에 현존하는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 동상이다. 맥아더 동상도 논란이 되는 와중에 트루먼의 동상이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는 강경파의 경우에서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남한 파병을 최종승인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점을, 온건파 측에서는 맥아더를 경질해서 핵전쟁을 막은 점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정치 성향이 어찌되었든 확실하게 인정할만한 업적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맥아더만큼 논란이 되지 않는 것이다.
  • 대통령 재임시절 예산위원회장을 만나면 늘 직접 나와서 악수로 맞아주었다. 그래서 "늘 뵙는건데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악수로 맞아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예산위원회장이 말하자 트루먼 대통령 왈, "아니오, 언론을 모르셔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신문에 '대통령이 예산위원회장에게 화났다'라고 나올 거요."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한성깔 하기로는 정말 유명한 대통령이다. 성질이 급하고 괴팍한 면이 있어서 욕도 잘했다고 한다. 당장 대통령직 승계 때도 백악관에 들어가면서 투덜거렸을 정도니까. 이 사람이 특히 즐겨 사용한 욕설은 바로 우리말로 '개새X' 정도의 의미인 son of a bitch(약자로 SOB)[51]. 6.25 전쟁 전화 급보를 받고는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새X들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나서는 "난 딱히 맥아더가 멍청한 SOB라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를 해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논쟁을 하다가도 이 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트루먼 대통령께서 저에게 SOB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제가 SOB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입니다.또한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를 할 무렵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는데, 연설하러 온 곳에 공화당원들이 온 것을 보고 별안간 "지옥에나 떨어져라!(Go to hell!)"이라고 욕설을 내뱉어서 케네디가 트루먼에게 직접 '자제 좀 해주세염'이라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트루먼은 처음에는 조지프 케네디를 싫어해서 그 아들인 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케네디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방금 당신(풀 흄)의 형편없는 평론을 봤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 없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새로운 코가 필요할 것이며, 눈에 멍이 들 줄 아시오."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마거릿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되려 "국민들의 80%는 내 편일 테니 넌 너무 걱정마라"고 여유있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백악관에 많은 편지가 도착했는데, 트루먼의 장담대로 대부분은 트루먼의 행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여성들한테서 "제 남편도 우리 딸을 대통령님이 하신 것처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란 내용이었다고. 혹은 미국인답게 American Bad Ass의 전형인 간지남으로 평가받기도 하고, 서민층에서는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행동들 때문에 그의 비판자들은 '도량이 좁고 비천한 인물'로 혹평하기도 한다.딸 마거릿은 그 평론가의 평론처럼 성악가로서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훗날 미스터리 작가로 꽤나 성공했다고 한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1950년 푸에르토리코의 민족주의자인 오스카 코아조와 그라젤리오 트레솔라에게 워싱턴의 블레어하우스[52]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대응으로 토레솔라는 사살되고 코아조는 체포 되었다. 다음 날 어떤 기자가 트루먼에게 "만일 대통령님께서 암살범들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트루먼은 주저없이 "그 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목구멍에 처박은 후 방아쇠를 당길 거요(I would have taken the gun from him, shoved it up his gullet and pulled the trigger.)."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체포된 코아조는 1979년 카터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고 이후 푸에르토리코에서 1994년 8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 후임자인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가 당선되기 전에 “아이젠하워는 이 자리에 앉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단언했다고 한다.[53]
  • 닉슨에 대해서도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트루먼이 강탈하였던 오키나와1972년 사토 에이사쿠에게 반환하였다는) 닉슨을 뽑는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공개적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닉슨이 재기하여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가는데 후일…
  • 대통령 재임 당시 백악관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기도 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만년필이 엉뚱한 곳으로 가있거나, 잠을 자려고 할때 옆에서 사람이 혼잣말 하는게 들린다던가, 에이브러햄 링컨 귀신을 마주쳤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한성깔 하시는 분 답게 백악관 일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그후에는 귀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54] 사실 과학적으로 귀신 이야기가 말이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백악관의 보수공사를 위한 예산을 타내려고 귀신 이야기를 꺼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다짜고짜 보수공사 얘기를 꺼낸다면 치적 쌓기용 혈세낭비 운운하는 소리가 나왔을 테니까, 귀신 핑계를 댄 것이다. 2층에 놓아둔 피아노 다리가 바닥을 뚫고 1층 천장에 삐죽이 나왔을 정도였으니, 폴터가이스트 핑계로 일부를 밀어내고 재건하지 않았다면, 백악관 전체가 무너지는 참사가 났을 것이다.

저것들을 종합해보면 패기넘치는 화끈한 성격과 다르게 얌전한 취미, 딸바보에 소꿉친구와 결혼, 평범한 사람으로써 대성공한 인생에 자기 손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귀신과 마주하는 등 여러모로 문학 주인공으로나 나올법한 인물이다.

6.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

  •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데이빗 맥클로우[55] 트루먼 전기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고전작품이다. 이 작품은 게리 시니즈[56] 주연으로 TV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포스터 오른쪽 밑부분은 항목 상단에도 있는 트루먼이 시카고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있는 모습을 재현해 낸 것.
  • 1977년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기영화 <맥아더>에서는, 6.25 전쟁의 수행 방식을 둘러싸고 맥아더(그레고리 펙)와 대립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나온다. 이건 실제 역사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맥아더인 관계로 트루먼은 맥아더의 승리에 열폭하거나 사사건건 발목잡는 인물처럼 묘사됨.

  •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캐나다가 공동 제작한 TV영화 <히로시마>에서는 케네스 웰시가 트루먼 역을 맡아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이후 원자폭탄 투하에 이르는 과정을 잘 재현한 작품.
  •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주인공인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도 친분을 쌓는다. 영화 버전에도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나이보다 좀 젊은 인상에 뭐랄까 좀 허영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하원 의원이 아니라 칼손과 술을 마시다가 루스벨트의 죽음을 듣고 칼손에게 미합중국 대통령에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며 자신의 라이터를 주곤 퇴장하는데 원작 소설에서의 후일의 행보는 다 편집됐다. 영화 버전 자체가 소설에 비해서는 고증을 많이 포기한 부분이 많아서...
  • 정말 여담으로 앤디 앤드루스가 쓴 "우화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인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천사장, 링컨 대통령, 솔로몬 왕보다 더 먼저 등장한 트루먼은, 주인공이자 60년 뒤의 미래에서 타임슬립해 온 40대 백수인 데이비드 폰더에게 자기의 좌우명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57]에 바탕한 충고를 해주어 책임감을 북돋워준다.
  • 퓨처라마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이 나온 몇 안 되는 미국 대통령중 하나인데 로스웰에서 어떤 외계인이 발견되자[58] 이 외계인을 51구역으로 보내고, 때문에 거기서 찍던 달착륙 조작영상을 못찍게 되자 NASA를 만들고 진짜로 달에 사람을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후 조이드버그를 구출하러온 프라이와 릴라를 보고 루즈벨트의 유령 맙소사를 외치며 기겁한다. 게다가 구출 과정에서 조이드버그의 방광을 얼굴에 맞는 굴욕을 당한다.
  • 나치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대체역사게임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마지막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신문기사에서 더는 인명피해를 초래할 수 없어서 항복했다고 한다. 생사는 불분명 하나 로스웰 UFO 추락사건이 패색이 짙은 연합국을 돕기위해 다트 이슈드라는 비밀결사 집단에서 미국측에 기술을 전수해주려는 눈속임으로 보아 정황상 미국 저항군측 지도자가 이 사람으로 추정된다. 최신작 뉴 콜로서스 기준 미국이 나치에게서 해방된 만큼 고전시간대의 FDR 포지션을 트루먼이 이어받을 듯 하다.
  • 아버지의 깃발에 등장한다. 아이라 헤이즈, 존 브래들리, 레니 개그넌과 악수를 나누며 모금 활동을 독려한다. 배우[59]가 꽤 싱크로율이 좋은 편이다. 캐스팅을 꽤 잘한 편.

7. 관련 문서


  1. [1] 그전과 같다면 그의 임기는 한달 보름 뒤인 3월 4일에 끝나야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이는 1933년 2월 6일에 발효된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조지 워싱턴이 퇴임 이래(1797~1933) 136년간 계속 같은 날(3월 4일)로 유지되던 정, 부통령의 취임식은 이로서 모두 1월 20일이 되면서 그도 마찬가지로 부통령 취임을 1월 20일에 했기 때문이다. 존 낸스 가너가 수정헌법 20조에 따라 1941년 1월 20일 퇴임하면서 루즈벨트의 3선 러닝메이트 헨리 A.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는 1월 20일에 취임하고, 퇴임했다.
  2. [2] 트루먼 이후로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1월 20일에 취임과 퇴임을 하게 되었다.
  3. [3] 현재 명칭은 William Chrisman High School.
  4. [4] Spalding's Commercial College.
  5. [5]미주리 대학교 캔자스시티 캠퍼스 법학대학원,
  6. [6] 젊은 시절의 키는 175cm
  7. [7] 직역하면 “모든 책임은 이곳(집무실 책상)에서 멈춘다.”. 트루먼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
  8. [8] 이런 식으로 알파벳 한 글자를 그대로 미들네임으로 하는 건 스카치 아이리시(아일랜드 섬의 얼스터(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변 지역)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주민. 현재도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가 다시 미국에 이주해서 상당수가 정착돼 있는데 이들을 Scotch-Irish American이라고 한다. 해리 트루먼도 Scotch-Irish American이다. 참고로 스카치 아이리시라는 표현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구닥다리 표현이라 쓰이지 않고 대신 Ulster Scots라고 부른다. 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Scotch를 스코틀랜드와 관계된 먹을거리에 한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스코틀랜드계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옛 용법이 남아 Scot(s)나 Scottish와 동일한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사이에 흔한 관행이라고 한다.
  9. [9] 물론 시어도르 루즈벨트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그랬듯이,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한번씩 안경을 써본 경력이 있다. 하지만 대중적 공식 이미지로서 쓴 이미지가 남은 대통령은 윌슨과 트루먼, 거기에 더 더해야 두 명의 루즈벨트 정도이다. 참고로 안경은 1500년대(16세기)에 나타났다.
  10. [10] 심지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존 F 케네디가 군대에 갈 수 없는데도 가문빨로 군대에 간다. 단 이때는 분위기가 제1차 세계대전과는 좀 달랐다.
  11. [11] 이후 법대 야간 코스를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
  12. [12] 실제로 트루먼은 재임기간 뉴딜을 한층 강화한 "페어 딜(Fair deal)"로 사회보장정책과 완전고용을 완수하였다.
  13. [13] 흥미로운 건 월리스는 전시 각료감이었는지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게 관여했고, 또 민주당 내에서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소련에도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기에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냉전의 불안감이 줄어들었을 것이란 옹호론과, 미국이 소련에게 끌려다니는 호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비판론이 있다.
  14. [14] 요나스 요나손의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이 일화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15. [15] 크게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전후 처리만 봐도 알 수 있다.
  16. [16] 이미 공화당은 1940년 대선부터 꽤 인기가 있는 상황이었다. 1944년 대선때는 꽤 많은 선거인단수인 25명의 오하이오주, 13명의 선거인단 수를 가지고 있던 인디애나주, 12명을 가지고 있던 위스콘신주 등 12개 주에서 이겼다. 그래서 당시 1944년 대선 당시에는 99명을 얻은 상태였다.
  17. [17] 사실 여론조사와도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18. [18] 사후적으로 보면 1936년 대선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시행한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서 경제 불황이 상당히 개선된 상태였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다만 소위 말하는 식자, 엘리트 층에서 루스벨트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대규모 편지 여론조사가 크게 빗나간 반면 갤럽은 정확한 예측을 했다는게 중요. 갤럽은 당시 대선으로 현대적 여론조사의 효시가 되었고, 그 갤럽이 12년만에 틀리니까 이슈가 된 것. 여튼 실제 1936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미 대선 역사상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에 비견될 만한 기록은 1972년 대선의 리처드 닉슨이나 1984년 대선의 로널드 레이건 정도밖에 없다.
  19. [19]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에다 미국이 대표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중국,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 진영이 모두 참전했다. 소련은 물론 곁다리로만 했고 직접 참전한다고 하진 않았다.
  20. [20] 정확하게 만주에 20여발, 압록강 이남에서 충주를 섹터로 하는 지역에 12발으로 총 32발, 그외 한반도 동서해안 전체에 반감기 50~100년에 이르는 방사성 코발트로 도배하는 계획이었다.
  21. [21] 방사능 폐기물들이 압록강, 두만강 강물을 따라 동해와 서해로 흘러들어갈 것이므로.
  22. [22] 물론 현재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보듯이 방사능이 계속 남아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23. [23] 미국에서는 6.25 전쟁을 '트루먼의 전쟁(Truman's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4. [24] 미 공군은 1947년 육군 항공대가 독립하여 창설되었다.
  25. [25] 일본은 망했고, 영국은 쇠퇴한데다 동맹이고, 러시아해군력이란 볼품 없으니.
  26. [26] 당시 미 해군예산만으로 타국가의 모든 국방비를 합한 것보다 많았는데 그 유지비용이 어마어마해서다. 지금도 공군과 육군예산을 더해도 해군이 더 쓴다.
  27. [27] 이후 포레스탈 장관의 헌신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명명되었다.
  28. [28] 미군의 각군 원수 계급 진급자는 종신 복무가 보장된다. 이 때문에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육군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도 출마 후 전역, 대통령 퇴임 후 예비역 재소집이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에 재직했다.
  29. [29]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이자는 정책 때문에 개명당했다고. 참고로 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이름은 1대함을 빼고는 모조리 저런 식으로 취소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30. [30] 1971년 12월 촬영
  31. [31] 트루먼의 재임시기에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이 헌법에 성문화되었으나 현직 대통령인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항이었기 때문에 3선 도전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했다. 현재도 이건 마찬가지라 2선까지 해야 하는데 1선만 하고 물러났으면(혹은 재선에 실패했다면) 나중에 다시 도전해서 한번 더 할 수 있는데 그 자격을 가진 생존자는 지미 카터 한 사람 뿐이다.
  32. [32] 스토아 철학이란 의미인데, 흔히 극기, 인내로 번역된다.
  33. [33] 현재로는 윌리엄 크리스맨 고등학교
  34. [34] 철의 장막 항목에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연단에서 연설하는 처칠 뒤에 트루먼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35. [35] 수정헌법에서 3선 금지 조항이 나온 게 1951년이라 트루먼이 원했다면 3선을 나설 수도 있지만 나가지 않았다.
  36. [36] 즉,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이므로 미리 막는다는 뜻이다.
  37. [37] 당시의 결정을 두고 그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한 맥아더를 제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비난도 있었다.
  38. [38] 중공군을 향한 지나친 과소평가, 원폭 투하 이외의 대안 부재 등.
  39. [39]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동시에 서방진영의 이익확보
  40. [40] 공산주의 확산 저지
  41. [41] 예스맨인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의 말만 듣다가 졸전한 사례 등. 다만 알몬드는 미군 입장에서는 똥별이었을지 몰라도 10만명 이상을 살린 흥남 철수의 구세주이다.
  42. [42] 군정 당시 본인의 의지에서 비롯된 철저한 한국 권한 배제 등.
  43. [43] 트루먼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맥아더를 고의적으로 고평가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도 존재한다.
  44. [44] 거기에 일본 우익들은 트루먼이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손에서 강탈했다면서 오히려 분노하고 있다고 한다. 미친
  45. [45] 그리고 그 당시 일제가 나치 못지 않게 항복해야 국민들이 사는데도 항복을 하지 않고 계속 싸우겠다고 하니 트루먼 입장에서는 다 쓸어버리고 싶으나 그러면 인명손실이 나니 그냥 원자폭탄 두 방 날려서 수뇌부들을 겁주는 것이 나았다. 아직도 일제 당시의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 일제시절을 지독히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전후 사정이 다 밝혀지면서 이들이 생각했던 일제가 오히려 전범에 가까운 짓을 너무 많이 저지르고 국토가 안전할 거라고 하더니 오히려 초토화 되어서 일본은 재기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46. [46] 게다가 일본이 간과하는 사실중 하나는 트루먼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덕분에 지금의 경제대국 일본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맥아더의 일본 미군정의 정책 방향은 다시는 힘을 기르지 못하도록 일본을 공업능력을 거의 배제한 농업위주의 국가로 전환하는 것이었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이 상당부분의 군수물자를 일본에서 발주하는 덕분에 가루가 됐던 일본의 급속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베이스로 일본이 고도의 경제부활을 이뤄낼 수 있었다.
  47. [47] 다른 시각으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가 없었다면 연합군뿐만이 아니라 일본군 점령지, 또는 식민지 주민들이 더 많이 희생되었을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일부 일본인들까지 공감하는 의견이라고 한다.)
  48. [48] 한국에서는 로널드 레이건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는데, 트루먼이 원조다. 레이건은 선거운동 중에 트루먼의 이 말에 지미 카터를 까는 표현을 추가했을 뿐이다.
  49. [49] 그 이전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유일하다 싶은 고졸이다. 흥미롭게도 역시 민주당 출신이며 변호사를 땄다. 또 밀러드 필모어가 고졸 출신 대통령인데 트루먼은 그를 신랄하게 깠다. 항목 참조. 따지고 보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아예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50. [50]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근대 이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거의 다 명문대 출신들이다.
  51. [51] 지금도 심한 욕설이지만 이때 당시는 정말 쌍욕중의 쌍욕이었다. 이 당시에는 '제기랄!'이라고 번역되는 "Damn!"도 욕설로 간주되던 시절이었으니 이건 대통령이 "개XㅅX"란 육두문자를 쓴것이나 같은 수준의 일이었다.
  52. [52] 당시 백악관은 수리중이었다.
  53. [53] 실제 아이젠하워는 재임중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 아이젠하워가 국민들의 지지속에 상당히 권력이 강했던 대통령임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자리의 어려움과 막중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
  54. [54] 이전에 링컨의 유령을 만났다는 이들의 일화는 대개 평범했다. 처칠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걸었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 그 보좌관들은 보고 놀라고 빌헬미나 여왕(네덜란드의 여왕)은 아예 기절했다.
  55. [55] 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의 원작자.
  56. [56] 포레스트 검프에서 댄 중위 역, CSI : NY맥 테일러를 연기한 배우다.
  57. [57] 국내 번역판에서는 직역하여 '공은 여기서 멈춘다' 라고 번역되었다.
  58. [58] 극비리에 공군 기지를 방문하기 위해 수송기 안 통조림 상자 속에 숨어서 왔다.
  59. [59] 데이비드 패트릭 켈리, 이후 존 윅 시리즈에서 ‘청소부’란 이름의 시체처리업자인 찰리역으로 나온 배우
  60. [60] 트루먼이→도루만이→돌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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