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조지

1839년 9월 2일 ~ 1897년 10월 29일

1. 개요
2. 생애
3. 생애 후반부의 헨리 조지
4. 헨리 조지의 사망 이후
5. 관련 항목

1. 개요

진보와 빈곤을 저술한 학자이자 정치가, 경제학자.

2. 생애

헨리 조지는 미국 펜실베니아 필라델피아의 중하위층 가정에서 리차드 S. H. 조지(부)와 캐서린 프랫 V. 조지(모)의 10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종교서적 출판업에 종사하는 헌신적인 미국 성공회신자였기 때문에 어린 헨리 조지를 필라델피아에 있는 성공회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헨리 조지는 그곳의 종교적인 훈육에 대한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졸업하지 않고 그 학교를 떠난다.그의 공식적인 학력은 14세 때까지이며, 그 후 15세가 되던 1855년 4월에 헨리 조지는 호주 멜번과 인도 콜카타로 항해하는 배, 힌두호(Hindoo號)의 선원이 된다. 14개월 후 그는 필라델피아로 돌아왔으며, 그곳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전까지 식자공 견습생으로 일했다. 19세기 중반 골드 러시가 일어났을 때, 서부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브리티시 콜럼비아 등지에서 금광 채굴을 하였으나 생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후 1865년 헨리 조지는 인쇄공이 되어 처음으로 신문산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자, 편집인을 거쳐 발행인이 된다. 그는 수개의 신문사에서 근무하였으며, 후에 자기 소유의 신문사 San Francisco Daily Evening Post(1871-1875)도 갖게 된다.

캘리포니아에서 헨리 조지는 당시 18세였던 호주계 미국인 애니 C. 팍스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고아였기 때문에 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부유한 그녀의 삼촌은 가난한 구혼자인 헨리 조지를 완강히 거부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신부 삼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861년말에 결혼을 강행하였고, 4자녀를 낳았다. 헨리 조지의 부인은 모계의 영향으로 아일랜드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그의 자녀들도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헨리 조지는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로 남았다고 전해진다.

1862년 11월 3일 헨리 조지와 그의 부인 애니 C. 팍스는 장남 헨리 조지 주니어(1862-1916)를 낳는다. 헨리 조지 주니어는 후에 뉴욕주의 하원의원이 된다. 1865년에는 후에 조각가가 되는 둘째 리처드 F. 조지(1865-1912)를 낳는데, 이 즈음에 헨리 조지의 가정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생계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 시기 이후 신문산업에서 헨리 조지의 명성이 올라감에 따라 그의 가족들은 서서히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헨리 조지의 다른 두 자녀는 모두 딸인데 장녀인 제니 조지 앳킨슨(1867-1897)은 단명하였고, 차녀의 이름은 안나 A. 조지(1879년)였다. 차녀 안나 A. 조지는 무용수이자 안무가였던 아그네스 드밀(Agnes de Mille)과 연기자였던 페기 조지(마가렛 조지 드밀)의 어머니이다.

헨리 조지는 최초에 링컨을 지지하는 공화당원이었으나 후에 민주당원이 된다. 그는 철도산업과 광산업에 존재하는 이권(배타적 사업권)을 강력하게 비판하였으며, 부패한 정치인, 부동산투기자, 인력(人力)소개업자 등을 매우 싫어하였다. 헨리 조지는 1868년 "철도산업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란 기사에서 처음으로 그의 정치경제적 사상을 피력하였는데, 그 기사에서 헨리 조지는 주장하기를, 철도건설의 붐은 단지 이권(배타적 사업권)을 갖고 있는 극소수 특권층 및 관련 기업들에게만 혜택을 줄 뿐, 건설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노동자를 절망적인 빈곤에 빠뜨린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의 경영진으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센트럴퍼시픽철도회사 경영진은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선거에 입후보 하려던 헨리 조지의 계획을 무산시키게 된다.

1871년 어느날 헨리 조지는 말을 타러 나갔고, 샌프란시스코 만(灣)이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말을 세웠다. 후에 그는 이 때 받은 영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대화소재를 찾던 나는 지나가는 트럭운전수에게 그곳의 토지가격이 얼마냐고 물었다. 그는 소가 쥐처럼 보일만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떼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도 정확히 알진 못해요. 다만, 저쪽에 1에이커 당 1000달러에 땅을 조금 팔려는 사람이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부(wealth)가 증가함에도 가난이 사라지지 않는 원인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토지가치가 상승하므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 특권에 따른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헨리 조지는 인구의 증가에 따른 토지가치의 상승은 토지소유자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가 그것을 향유하고 있다는 문제를 발견하였으며, 이것을 두고 특권이라고 지적하였다.)

더욱이 헨리 조지는 뉴욕시를 방문할 때, 오랜 기간 발전한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이 덜 개발된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생활고에 시달리는 명백한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찰과 발견은 1879년에 발간된 그의 책 진보와 빈곤의 주제와 제목이 된다. 진보와 빈곤은 당대에 300만부 이상이 팔렸고, 이후에도 수백만부가 팔리는 등 큰 성공을 거둔다. 그 책에서 헨리 조지는 주장하기를, 시장경제 체제에서 사회와 기술의 발전에 의해 창출되는 부(wealth)의 상당부분이 경제적 지대(rent, economic rent)라는 명목으로 토지소유자와 독점사업자에게 옮겨지는데, 바로 이 불로소득(unearned income)의 집중이 가난의 주요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노동과 같은 생산활동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는 반면, 토지(넓은 의미로는 자연에 의해 주어지는 것)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함으로써 사적 이익을 추구하도록 허용하는 제도에 대하여 헨리 조지는 심각한 불의(不義, injustice)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경제 체제를 노예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그의 이와 같은 생각은 임금노예의 개념에 상당히 근접하다. 진보와 빈곤(1879)에서 그는 토지세를 주창했는데, 이는 정부가 토지의 가치에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저 토지를 소유했다는 명분만으로 지주들이 불로소득을 사유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헨리 조지가 주창한 토지세는 순수하게 토지의 가치에만 부과하는 세금으로서, 토지에 가해진 개량(정지작업, 심겨진 수목, 건물, 각종 시설물 등)의 가치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다. 즉, 토지에 가해진 개량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토지개량에 따른 이익은 그 투자자들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3. 생애 후반부의 헨리 조지

헨리 조지가 위와 같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개인적 경험이 있었다. 즉, 그 자신이 심한 가난을 겪어 보았고, 여러 지역을 이주하면서 다양한 사회를 경험했으며, 급격히 팽창하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였던 경험이 그에게 영감을 준 것이었다. 특별히 헨리 조지는 당시 캘리포니아의 철도건설이 토지의 가치와 지대(rents)를 상승시키는데, 그 상승의 폭과 속도가 임금(wage)상승의 그것을 훨씬 웃돌아 일반 대중들이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1880년, 저명 작가와 연설가가 된 헨리 조지는 그 자신이 영국계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뉴욕시로 이주한다. 그리고 뉴욕에서부터 시작하여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등 해외 각지에서 순회연설하였다.(당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토지문제가 주요 정치적 이슈였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1886년에 헨리 조지는 연합노동당(the United Labor Party) 후보로 뉴욕시장 선거에 출마한다.(연합노동당은 중앙노동조합(Central Labor Union)이 만든 정당이었는데, 오랜 기간 지속되진 못했다.) 뉴욕시장 선거에는 그는 득표율 2위로 낙선했고, 대신 태머니홀(Tammany Hall, 19세기의 사조직에서 출발하여 20세기 초까지 뉴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패한 정치조직)의 에이브럼 S. 휴윗이 당선됐는데, 헨리 조지의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가 조작되었다고 믿었다.(참고로 이 선거에서 득표율 3위를 차지한 후보는 후에 미국의 26대 대통령이 되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이듬해인 1887년 헨리 조지는 뉴욕주 국무장관 선거에도 출마하여 득표율 3위로 낙선했는데,이 선거 이후 연합노동당(the United Labor Party)은 힘이 약해지게 된다. 당시 연합노동당의 관리조직은 대부분 조지주의자들이었으나, 이 외에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가톨릭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는 헨리 조지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톨릭 노동운동가들은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의 파면사건으로 인해 낙담한 상태였다. 그리고 상당수 당원들이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헨리 조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자본주의에 반대한 마르크스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모두 공유화할 것을 주장한 반면, 헨리 조지는 토지와 자본을 구분하여 그중 토지만을 공유상태에 근접하게 만드는 제도(지대조세제)를 주장하였다. 즉, 마르크스와 달리 헨리 조지는 시장경제와 가격의 기능과 사유재산을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저서 여러 곳에서 경쟁의 순기능이 강조된다. 마르크스(1818-1883)와 헨리 조지(1839-1897) 두 사람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갔던 논쟁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4. 헨리 조지의 사망 이후

한편, 당시 유럽에서는 위축되어 있던 노동운동이 헨리 조지의 영향으로 다시 활발해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활발해지는 노동운동의 배경에 헨리 조지가 있음을 파악한 로마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황 레오 13세는 본인이 노동자들에 대하여 상당한 연민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조지의 사상을 실제 이상으로 급진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여 경계하였다. 결과적으로 교황청은 헨리 조지의 지지자였던 가톨릭 노동운동 지도자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파면하게 된다.

후에 레오 13세는 가톨릭 사회교리의 초석을 놓은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발표하는데, 노동조합 결성을 지지하고 자본가들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주장하는 이 회칙에서도 헨리 조지의 사상은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이에 대하여 헨리 조지는 1891년에 매우 정중하고 수려한 문체로 토지의 공공성을 성서적으로 입증하는 편지,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교황청으로 보낸다. 그의 공개서한이 교황청에 도달한 이후 교황청은 공식대응을 하지 않았으나, 교황청이 앞서 파면한 에드워드 맥글린 신부를 복권시킨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레오 13세가 헨리 조지의 사상에 대해 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오해가 해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자유무역에 대한 정책을 두고, 헨리 조지는 노동운동의 주요지도자였던 테렌스 V. 파우덜리와 갈등을 겪고 있었다. 헨리 조지와 파우덜리는 원래 가까운 사이였으나, 헨리 조지가 관세에 대한 반대입장을 굽히지 않음으로써 파우덜리를 비롯한 일부 노동운동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왜냐하면 당시 노동운동가들은 수입물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 자국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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