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열차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 한가운데 초점이 맞춰진 집단은 아동과 노인 즉 바로 가스실로 갈 집단이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유대인들도 보이는데, 얼마 안 가 자신들에게 참혹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씁쓸한 장면이다.

1. 개요
2. 배경
3. 특징
4. 경과
5. 원인
6. 가스실
7. 전후 유럽의 반응
8. 일부 시오니즘 과격파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9. 전후 비판
10.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11. 기타
12. 관련 어록
13.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
14. 관련 문서

1. 개요

Holocaust[1]

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나치 정권이 일삼은 학살극을 뜻한다.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 שואה)'로도 불린다.

이러한 홀로코스트의 주된 희생자는 유대인이었으며, 유럽 내 유태인 9백만 명 중 3분의 2인 6백만 명이 죽었다. 그 외에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또는 나치스를 정치적으로 반대하던 자들도 포함되기도 한다. 총 희생자의 수는 흔히 알려진 유대인 600만을 포함한 1,100만 정도로 잡는다. 좀 더 넓게 정의할 경우 동부 전선에서 군사작전 중에 죽은 민간인을 제외한 나치 점령지에서 정책적으로 학살당한 소련인까지 포함해 1,700만까지 잡는 경우도 있다.[2][3]

2.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들의 식민지에는 해당하지 않았고[4],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5]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그 정도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 흔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감정을 처음 접했을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6]

아돌프 히틀러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에게 찾아야만 했는데, 그 목표가 바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대인의 배신과 무능 때문이었다. 유대 자본은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히틀러에게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3. 특징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이점이 있다. 인류 역사상 학살은 어디를 가나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학살과 매우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은, 전쟁터에서 우발적, 충동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 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매우 계획적이고 산업적인 형태의 체계화된 학살이라는 것.[7] 그리고 학살이 수단이라기 보다는 목적으로 보인다는 것.[8]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제3 제국의 인종정책의 의미는 사실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결국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했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즉, 슬라브인이나 폴란드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이 특징 아닌 특징이다.

게다가 어찌 보면 이 학살의 과정은 그냥 자기가 국민으로 삼은 데는 후하고 아닌 놈들에겐 더없이 가혹했을 배타주의적 상징으로 시작된 거라고 보면 되지만, 유대인 학살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그 유대인들이 소유한 경제권과 상권, 자금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시작된 것으로 실제로 살던 집 빼앗아서 독일인에게 줘 버리는 등의 행동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헌데 문제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되면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날라 버리거나 재산 챙겨서 3국으로 도주하는 등의 사태가 생기면 골치 아파지므로 아예 그냥 규모가 매우 거대한 강도질을 해 버린 거라고 보면 된다.

즉, 히틀러의 문제는 아리아계 독일인만 국민으로 생각하고 나머지는 폐품 취급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애초에 나치당 성격상 극좌와 극우가 섞여 있어서 생긴 상승작용도 한몫한 것도 있다.

또한, 히틀러는 어찌 보면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실행자 측에서 과당 경쟁이 붙어서 효과적인 학살방식학살정책을 내놓은 셈이다. 즉, 실제로 대부분 문제는 하인리히 힘러파울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아이히만 등의 작품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총통의 망상을 구체화한 셈이 되고. 게다가 이건 전쟁에 의한 과열 양상도 한몫한다. 요는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에 그 국가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학대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물자징발을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이민족은 가혹하게 수탈해도 되지만 상대적으로 독일인을 돈 뜯지 않아도 된다는 개념이 대두되는 셈이니.... 일단 인종주의는 명분이고 그 안에서 실리를 취득하려고 한 거다. 뭐 간단히 말해 명분 있는 약탈 강도 살인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를 학살한 부분은 대략 이런 구도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과도한 복지정책 등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즉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 등으로 낭비되는 재원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운다고 생각했던 거다. 즉, 나치당은 장애인이 도태되면 그들의 공동체가 건강해 진다는 해괴한 발상을 가졌던 거다.

집시의 경우 유대인과 비슷하지만, 집시에 대한 관점은 좀 더 전통적인 개념에서 기인한다. 즉, 유대인들의 경우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졌던 이들의 일종의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증오의 성격이 있었다면, 집시에 대한 개념은 거의 극우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동성애자들은 대략 "전통윤리적" 개념을 가지고 이뤄진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위의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나치당의 개념은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되는데, 동성애자들은 당연히도 "번식" 자체의 행위를 피하는 부도덕으로 본 거다.

게다가 이 당시는 아직 동성애를 정서 질환으로만 봤었고, 의학적 발전이 수반되지 않아서 "치료할 수 없는 장애" 정도로 봤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실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학살이 개념 구분되는 이유는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한 반면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각한 아이러니는 외려 나치당원이라는 사람들 중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개념을 수반하긴 했지만, 반대로 실상을 보면 이건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로 깎아내렸던 개념과 연관성이 생긴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

즉,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햇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뭐 로스차일드 같은 경우를 보면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긴 하지만)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9],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내의 좌파적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의 계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얼마 없다.

4. 경과

동성애 단체들은 강제 해산당하고 동성애나 성에 관한 학술서는 모두 불태워짐.게슈타포에 의한 동성애자 사냥이 시작됨.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체포된 동성애자만 10만 명, 그중 5만여 명이 일반 교도소로, 1만 5천여 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 동성애자 중 60%가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이 시작.6월, 유대인이 모든 공직에서 추방. 강제수용소 및 노동수용소의 설치가 시작.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혼인이 금지.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당함.
  • 1936년.
유대인은 전문직(변호사, 의사, 교수직)에서 제외됨.하인리히 힘러, '동성애와 낙태를 방지하기 위한 제국 중앙 사무국' 설립.
  • 1938년. 11월 9일 유대인 대박해(Kristallnacht, 혹은 Pogrom) 시작.
게토설치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유대인의 법적 권리 상당부분 박탈.
4월까지 유대인 재산의 강제 매각 실시. 장애인 살해계획(T-4 프로그램) 시작되다.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짐.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음. 총 희생자 수 약 20만 명.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프로그램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명목상으로 보면 이 문서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인력이 41년 이후 홀로코스트에 참여(특히, 노약자들 골라내는 것)했으며 인종차별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한다.
  • 1940년. 게토실시.
수용소로의 강제이주 전에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 거주하게 함. 1945년 종전 시까지 운영.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바르샤바 총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의 2.4%밖에 안 되는 게토 내에서 거주. 열악한 시설로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개전 이후 거의 모든 점령지에서 게토 성립.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 협력.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당시 유럽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를레앙 괴담 문서 참조.
40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루어짐. 대부분의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뤄졌다.치안유지군(Einsatzgruppe)의 학살 시작.소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10]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 이틀 만에 3만 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 총 160만 명 살해.최초의 학살수용소가 12월 헤움노(Chelmno)에 세워짐. 이어서 7곳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은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다른 방식). 독가스를 통한 샤워실 학살이 이루어진 곳. 일반적인 살해방식에 의한 학살도 여전히 자행된다. 총 300만 명 학살(학살수용소 한정).
  • 1942년 초. 반제(Wannsee) 회의. 홀로코스트 전면실시. Final Solution(최종 해결책)이 채택되다. 7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짐. 학살수용소 본격적으로 가동 시작. 종전까지 가동된다.
  • 1944년 죽음의 행진 시작.
연합군이 급속히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학살수용소를 파괴하고 수감자 및 포로들을 이송. 이 과정에서 기아, 구타, 병, 추위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 정확한 사망인원 추산 불가.
  • 1945년 종전
죽음의 행진에서 약 6만 명이 생존한다. 종전 이후 4주 동안 질병 등의 후유증으로 1만 명 사망.[11] 동성애자들은 종전 이후 해방되기는커녕 나치가 수집한 자료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서독, 동독 정부에 의해 다시 수감되었다.

5. 원인

또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12][13]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14]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치당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들도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유럽의 반유대감정은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15]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명언이 있다.

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이상의 발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이 2개의 유명한 어구에서 사용된 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annihilate로 번역되며 '절멸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1:1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destroy로도 번역될 수 있고 전간기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군사교리의 용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섬멸하거나 몰살하거나 그렇게 심각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Vo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K. Jager 1941, 12.1

이 외에도 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절멸이라고 명시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절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설이 자주 제시된다.[16] 그러나 아래에서 읽어낼 수 있다시피 '최종 해결책' 혹은 '물리적 해결', '정치적 해결' 등의 단어[17]는 언어를 관용화해 이의 무게를 무화(無化)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학계 다수의 의견. 신어를 떠올리면 알 수 있을 듯.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과 예루살렘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 당시 피고로 심문받던 나치 수뇌부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 선전문구(Schlagworte)를 주로 사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추상적인 분노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18]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19]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학살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6. 가스실

홀로코스트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살해방법은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실이다.

나치는 살해대상들을 "정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에는 일반적인(?) 살인법처럼 주로 구덩이를 파고 총살을 시켰다. 하지만 이 방법은 곧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전쟁 통에 귀한 총알을 사형에 쓰느라 낭비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루에 수십, 수백 명을 쏴 죽인 SS대원은 PTSD 증상을 호소했고, 지휘부는 이들의 고충을 받아들여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바로 가스였다. 이 가스형을 생각하게 된 동기가 무시무시하다. 발터 라우프(Walther Rauff)[20] SS대령이 한적한 교외에서 잠시 차를 멈추고 잠을 청했는데 시동 끄는 것을 깜빡 잊었고, 문득 잠에서 깨보니 배기가스에 중독되어서 사지가 굳어 있어 꼼짝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탈출하고 이 경험을 토대로 가스형을 개발했다.그냥 죽었더라면 최초의 가스실은 배기가스의 일산화탄소를 이용한 방식으로, 지하실 같은 밀폐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두고 꼼꼼히 빈틈을 막은 후 자동차 배기구에 호스를 달아 지하실에 연결한 뒤 열심히 공회전을 돌려 일산화탄소를 발생시키고, 산소부족으로 질식해 죽은 사체를 처리하는 방식이 한동안 유지되었다. 이것이 S트럭이라고 불린 처형 방식이다. 이후 독일은 한창 석유 한 방울이 아쉬울 시절이었고 귀한 석유를 공회전에 낭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의견이 생겨 이 방법도 중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스실을 이용한 학살은 아주 효율적(?)인 학살방법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때 등장한 아이디어가 '치클론 B를 이용하자'라는 것이었다. 치클론 B는 밀폐된 공간에 터트려서 방역을 하는 살충제로, 당시 독일 국방군은 마구간[21] 방역용으로 I.G 파르벤에서 대량의 치클론 B를 납품받아서 석유보다 공급이 넉넉했다.[22]

어찌되었든 치클론 B는 매우 치명적인 독가스였고,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치클론 B의 치명성을 본 나치들은(출처:The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권 p113, Jozef Buszko) 이전에 쓰던 배기가스식 가스실보다 더 싼 값에 살해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면서 아우슈비츠뿐만 아니라 점령지 전역에 가스실과 치클론 B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물론 치클론 B가 석유보다는 싸기는 했지만 결코 만만찮은 가격의 물건이었는데 그런데도 물자가 아깝다고 하면서도 기어코 독가스를 생산해서라도 죽이려 들었다. 전 유럽과 나라의 존망을 건 전쟁을 치르는 중에도!

여담으로 독일 언론들은 수용소에 대량의 방역용 약품이 공급되는 것을 보고 나치 수용소가 정말 위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 같다고 기사를 쓰는 병크를 저질렀다.

7. 전후 유럽의 반응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혔다.

이만큼 거대한 사건이 그토록 쉽게 잊힐 수 있다는 것은 얼핏 이상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 한국전쟁이나 4.3 사건 당시에 그토록 무수한 학살을 겪었으면서도, 막상 우리가 기억하는 학살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단순화되어 있지 않은가. 무수한 학살이 이뤄졌던 많은 장소들은 현재 평범한 아파트 단지이거나 시가지의 일부가 되어 있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장소에서 학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러한 상황이 전후 유럽 전체에서 일어난 것이다. 전쟁은 많은 사람을 죽게하고, 한국전쟁이나, 2차대전 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죽어나간 전쟁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를 잊고자 한다.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 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23] 또,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다른 학살들이 외면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당장 2차대전 당시에 소련인들은 약 3000~4000만, 중국인들은 약 2300만이 죽었다. 또한 서유럽에서도 엄청난 인구가 죽었다. 유대인들은 대체로 600만이 죽었다고 추산되는데 대중은 유대인 학살에만 관심을 갖지, 더 많은 수가 죽은 그 이외의 학살이나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유태인 홀로코스트만큼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당장에 2차대전 하면 딱 홀로코스트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이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볼라 학살, 네덜란드의 대기근, 노르웨이의 레벤스보른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비단 제2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학살은 외면하고 오직 유대인 학살만을 강조하는 경향에는 미국 언론의 영향력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들의 절대다수가 유대계이며 이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만을 강조했다. 유대인의 3~4배에 가까운 희생자를 낸 소련과 중국이 미국의 주요 적국이었다는 점도 이러한 성향을 더욱 더 부채질했으며, 결국 우리가 제2차 세계 대전의 학살이라고 하면 홀로코스트만을 떠올리게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고 말았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합리적이고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24]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이것이 사회 교과서에서 나오는 실질적 법치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예시, 뉘른베르크 법이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또한 이는 모더니즘에 대한 회의를 낳으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일으키게 된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25]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것은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네오 나치가 아니다.이들 역시 네오 나치와 나치가 행한 여러 만행에 대해선 의견을 같이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학살당한 사람들의 정확한 수치가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 독일의 여건 등을 고려해보면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다른 비판으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국가들도 제노사이드를 행했는데 나치의 유대인 학살만 들먹이냐는 내용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대규모 식민제국 외에도, 그 작은 벨기에조차 콩고에서 고무 등의 자원확보 과정에서 나치보다 더 많은 1천 5백만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그 외에도 소련, 중국, 터키, 폴란드, 이라크, 이란, 스페인, 포르투갈, 몽골, 북한, 이스라엘 등에서 제노사이드가 발생해왔다. 상기한 워싱턴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식에서 미국 원주민에게 행한 만행들은 사과하지 않고 유대인의 아픔을 기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던 외침은 쉽게 묵살할 것이 못 되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 및 학살에 대한 범죄를 갖고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 소련도 아무리 못해도 2,000~3,0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어느 팔레스타인 역사학자는 "현재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나치의 홀로코스트만 들먹이며, 정작 나치처럼 학살한 자신들의 과거는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결과의 이유로는 가해국과 피해국의 선진국 여부와 세계적 영향력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인 유대인은 미국에서 강한 경제적 영향을 행사하고 있으며,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 등 여러 굵직한 식민제국들은 현대에도 선진국이거나 강대국으로서 강한 지위를 행사하는 반면 피해국들은 우리가 듣도 보도 못한 곳도 많을 정도로 현대의 약소국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제적인 지위도 낮고 국력도 약하니 조명을 받지 못 하는 것. 홀로코스트를 일으킨 당사자들이었던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기억하고 사과한다고 하지만 나미비아 문제에 대해서는 입 닦고 회피하려 들고 있기도 하고. 쉬운 이해를 위해 유럽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아프리카에 무슨 나라가 있는지 각각 나열해보자. 전자가 훨씬 쉽지 않은가?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도 선진국에서 일어난 일에 비해 약소국에서 일어난 일은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예시로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때도 이런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다른 학살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폴 포트천안문 사태 등이다.

동성애자들은 독일에 남아있던 동성애자 처벌법(소도미법 또는 계간죄)인 형법 175조로 인해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것도 나치가 모았던 정보를 토대로 말이다. 독일 형법 175조는 1969년이 돼서야 사문화됐고 1994년이 돼서야 공식적으로 형법에서 삭제되었다. 2002년이나 돼서야 독일 정부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게 사과했고, 형법 175조에 의한 피해자 구제는 2016년 현재 진행형이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가면 1만 9073㎡의 부지에 콘크리트 비석 2,711개가 설치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는데,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길 건너 티어가르텐 한가한 구석에 코딱지만 하게 설치되어있다.[26]

또 한 가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이는 일부 유태인들의 입장 역시 씁쓸한 면이 있다. 워싱턴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 건립 당시 추모비에는 홀로코스트로 인한 희생자의 숫자가 1,000만 명으로 기재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 내에 거주하는 유태인들[27]의 강경한 반대로 인해 결국 해당 추모비에는 희생자가 600만 명으로 기재되었다. 문제는 1,000만 명과 600만 명이라는 희생자 수의 차이가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모든 사람의 수를 합친 경우와 유태인 희생자의 수에 한정한 경우의 차이라는 것. 즉, 미국의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의 추모비가 유태인뿐 아니라 집시, 폴란드 등 동유럽인, 동성애자, 나치에 반항한 정치범 등 모든 희생자를 기리는 것을 거부하고 오직 유태인만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2016년 현재 모든 희생자를 언급하고 명시되어 있다. 이건 와전된 이야기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도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이는 미국 거주 유태인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고, 이 일화를 국내에 소개한 한양대학교 사학과 임지현교수 역시 이런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를 비판한 바 있다. 또한, 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배타적 태도가 반드시 외부 집단에 한정되었던 것도 아니고,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했던 유태인들이 전후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에서 유럽에 잔류했다가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유태인들에 대하여 보인 우월의식에 대하여 비판한 바도 있으니 참고할 만 하다.

8. 일부 시오니즘 과격파들과 유대인 지도자들의 오류

당시 시오니즘에 입각하여 이스라엘의 건국을 주장하던 유대인 중 일부 과격파는 이 학살을 동조, 호의적으로 평가해서 묵인했다. 그들에게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유대인 국가 건국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이게 최악으로 발현된 것이 어떤 것이냐면, 나치와 시오니즘 지도부가 협력관계를 구축한 사례들이다. 다만,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직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밝혀지기 이전이었으므로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을 지지한 경우였다.[28]

우선 1941년 1월 11일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오니즘 군사조직 아르군[29]과 독일 나치 사이의 군사협약을 제안한다. 이것은 위에 쓴 대로 나치의 목적이 유대인의 학살이 아닌 추방이라고 생각한 점도 있었지만,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큰 걸림돌이 영국이라고 생각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고 있는 영국은 가장 큰 적이었고, 마침 영국과 적대적인 데다가 유대인들을 추방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나치는 자연스러운 동맹 대상이었다.

유럽에서 유대인을 추방하는 것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대인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있다.

- 이츠하크 샤미르

샤미르가 보낸 편지는 나치에게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의 이스라엘 독립 활동(게릴라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독일의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추방하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이스라엘이 나치 독일의 우방이 될 것임을 명시했다. 나치는 이 편지를 무시했지만, 샤미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7대 총리가 된다.

또한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전부가 죽는 것보다는 소수(특히 건강한 젊은이와 유명 인사)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나치와 협력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도 엄청난 논란이 일어날 게 뻔한데, 이쪽은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킨 격이니 더더욱 문제점이 크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일화로, 1944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유대인 위원회 소속 카스트너는 나치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협약을 맺었다. 이 협약의 내용은 1,0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지불한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이게 왜 문제가 되나 싶지만, 카스트너는 나치로부터 이 정확히 1864명의 유대인을 살리는 대가로 대부분의 나머지 80여만 유대인들의 학살을 묵인했다. 즉, 유대인들에게 수용소로 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리지 않기로 한 것이다. 카스트너 자신부터가 유대인이었으므로 자기를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죽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살리는 것이 나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카스트너 자신이 말하기로도 저명한 유대인들[30]과 젊고 건강하며 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유대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43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도록 놔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치에게 이 유대인들의 목숨값으로 지불하기로 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 카스트너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대인들 중 150여 명의 부자들에게 경매를 통해서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권리를 팔았고, 이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협약의 내용이 알려지기 전에 카스트너는 이스라엘 정계에서 홀로코스트로부터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이 사실이 폭로되자 이스라엘의 법원에서 "악마의 계약을 체결한 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1957년 유대인 극단주의자에게 피살당한다. 비록 카스트너가 죽은 후에 상위 법원에서 그를 무죄로 고치긴 했지만, 이미 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뒤였다.

9. 전후 비판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의 법률에서 홀로코스트 부인론에 대한 처벌이 가능하며, 독일어 위키백과에도 이러한 내용으로 독일어 경고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홀로코스트란 역사적 사건은 분명 다시는 있어선 안 될 참극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여론도 나온다. 미국 유대인 로비단체들이 학살된 유대인들의 유럽은행 예금이나, 몰수된 재산과 미술품 등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 받아내 상당액수를 유용하거나 하는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31] 또한 조부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게다가 홀로코스트를 핑계삼아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즘 유태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하는 진상짓도 결코 좋게 봐줄 수 없다. 더욱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미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세력이 유대인이기에 이 점을 고의적으로 우회하고 그들의 적인 아랍인의 잘못만 들춰서 비난하는 여론 조장에도 상당한 한몫을 한다. 이쯤되면 오히려 막나간다고 욕해도 모자랄 판으로 보인다. 역사적 문제는 역사적 문제이고, 현재는 현재임을 유대인들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팔레스타인 문제와는 또 다르다. 역사적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느냐 아니냐가 문제이다. 유대인은 전자이고, 팔레스타인은 후자다.(이스라엘은 전자지만)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 중에서도 '역사적인 진실을 법적인 진실로 만들 필요가 없다'라며 반홀로코스트 부정법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제3제국이 홀로코스트를 일으켰기 때문에 나쁜놈이라고 하면서도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악행에는 무관심하거나 심드렁하다는 것 또한 문제이다.소련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던데[32]

9.1. 홀로코스트 허구설

문서 참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사역사학에 속한다.

10. 황당한 유대인 분류 기준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 헤르만 괴링[33]

이 사진 속의 아기는 1935년에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서 1등을 한 아기이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우승자를 직접 선정하기까지 한 대회였다. 부모에게는 막대한 상금이 내려졌고, 아기의 사진은 게르만의 우월성을 알리는 선전 잡지와 포스터에 실리기도 하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 아이는 사실 유대인 혈통이다. 아이의 부모는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노란색의 다윗의 별을 붙이고 다니지 않았고 철저하게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숨기고 살아갔다. 그리고 간크게도 세계에서 가장 아리아인스러운 아기를 뽑는 대회에까지 나갔던 것이다! 유대인인 자신들의 아이가 최고의 아리아인으로 선정될 줄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실제로는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가 대회에 부모 몰래 사진을 보낸것이라고 한다. 부모는 유대인이라는게 들킬것이 두려워 사진 작가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으나, 사진 작가는 원래 그 사실을 알고 있어고 실제로는나치들을 놀리기 위해서 한것이라고 한다.

1938년, 아이의 부모는 게슈타포에게 붙잡히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이를 아리아인이라고 속인 것이 들켜서가 아닌 단순한 탈세 문제였다. 심지어 감옥에 아주 잠깐 갇혔다가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리고 괴벨스도 히틀러도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그날까지 저 아이와 저 아이의 가족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현재 저 아이는 자라서 뉴욕 모 대학에서 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한 유대인 소년 한스가 있었다. 그의 부모는 신분을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고, 독일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살게 되었으며, 한스도 "아리아인으로 인정받은" 다른 독일인 아이들과 함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교사가 말하길, "내일은 골상학적, 그리고 유전학적 측면에서 우리 게르만족이 얼마나 우월한 인종인지 배울 거란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스는 겁이 덜컥 났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유대인인 것이 들통나면 학교에서 퇴학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들리는 강제 수용소라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 아닌가?[34] 갑자기 병을 핑계로 학교에 가지 않으면 그 또한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와 그의 부모는 크게 걱정하면서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냈고, 결국 그 다음 날 한스는 덜덜 떨면서 등교를 했다. 그리고 결국 수업이 시작되었고 한스는 줄자와 계측기로 한스의 키와 두상 형태를 측정했고, 체중계로 체중을 검사하고, 또한 유전자를 검사했다. 이윽고 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한스는 동프로이센 지역 바이킹 계통의 아리아인이네요! 아주 우월한 혈통이구나, 한스!"

한스는 크게 안심함과 동시에 어리둥절함을 느꼈다. 속으로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훗날 그는 독일 국방군에 입대하여,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는데, 종전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커피를 타러 서부전선에 간게 아니라??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기 의사로 루터파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 여자와 결혼한 아버지를 둔 1/2 유대인인 베르너 골드베르크(1919년생)는 1938년 12월 1일에 독일 국방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으며, 이때 육군 소속 사진사가 찍은 골드베르크의 사진이 이상적인 아리아인 병사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리는가 하면 모병 포스터에까지 사용되었다. 골드베르크는 다음 해 프랑스가 항복한 뒤 1단계 혼혈 유대인을 군에서 추방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제대 처분되었고, 입대 전에 일하던 의류 회사에 복직했다. 개종하긴 했어도 순수 유대인이었던 아버지는 결국 전쟁 중에 죽었지만 베르너 골드베르크는 살아남아 자식 셋을 얻고 2004년에 사망했다.

웃긴 사실은 나치당의 간부들 가운데에 그들이 말하는 "순혈 아리아인"의 조건에 만족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는 것이다. 나치당에서 추구하는 우월한 아리아인이란, 금발에 벽안, 그리고 건강한 신체와 운동능력, 뚱뚱하지도 않고, 너무 마르지도 않아야 하며, 웬만하면 시력도 좋아서 안경을 끼지도 않아야 한다"였는데...

  • 아돌프 히틀러 - 벽안이었지만 흑발이었다(어린 시절엔 금발벽안 이었으나 성장한 뒤 흑발로 바뀜). 애시당초 명예 아리아인이라는 개념을 만든 이유가 본인 때문. 20세기 초반의 인종구분으로는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은 알프스 민족(Alpine Race)라 하여 아리아인이긴한데 뭔가 순혈은 아니고....라는 요상한 분류였고 이는 제3제국의 수장에겐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흑발인 것도 모자라, 소아마비 장애인이였으며, 굉장히 말랐다.
  • 헤르만 괴링 - 벽안인 것은 맞으나 갈색 머리였고, 심각한 비만이었다.
  • 하인리히 힘러 - 흑발에 갈색안이였고, 얼굴의 생김새가 심각하게 동양인적였으며[35] 농담이 아니라 도조 히데키랑 똑같이 생겼다, 안경도 꼈다.
  • 루돌프 헤스 - 흑안에 흑발이었다.
  • 마르틴 보어만 - 벽안이긴 했으나 흑발이었고, 비만이었다.

당장 국가원수인 히틀러부터가 아리아인 기준에 미달이었고, 저렇게나 많은 고위 간부들이 아리아인으로 실격점이었다. 저것도 극히 일부만 소개하였을 뿐,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나치당 간부들이 아리아인 기준점에 실격이었으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정도만이 아리아인 기준에 얼추 맞아떨어질 뿐이었다.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주로 유대인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피해자들은 그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이고 일반 상식으로 보아도 유대인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치거나, 자신의 종교에 냉담해지면서 서구 사회에 동화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종교보다 국가가 중요하게 된 근대 시기에는 이런 사례가 더 많이 나타났다. 유대인이기 이전에 '우리나라의 국민'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인종주의에 경도된 나치의 유대인 판정법은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조상까지 봐서 유대인 혈통이 조금 섞여 있으면 유대인'으로 보는 정신나간 기준이었다. 유대인의 정체성을 꼼꼼하게 따져서 판정해도 학살을 정당화할 수 없는 일인데 그조차도 아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문에 자신의 몇 대조 조상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유대인으로 분류당하는 사람도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몇 대조 할아버지가 유대인이라고 한들, 자신이나 그전 세대에서 이미 개종을 해서 유대교를 믿지도 않고 문화적으로는 유럽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100년 전 조상이 유대인에서 개종했다고 해서 그 후손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리가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전통을 따른다는 특성이 있으니 100% 같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당신의 조부모 4명 중 1명이 알고 보니 일제강점기한국에 와서 눌러앉은 일본인이지만, 당신은 완전히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고 생활하고 있으며, 조부모에 대해서는 가끔 '네 조부모 중 한 분이 일본 출신이셨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이외에는 조부모의 출신 및 정체성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한국판 나치가 등장하더니 한일관계가 악화되어서 일본인들을 말살시킨다고 당신을 일본인이라고 하면서 강제수용소에 끌고 가는 꼴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한참 전부터 유대인을 욕하고 다녔는데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에 눌러앉아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 자신들부터가 자신은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TV 미니시리즈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에서도 주인공들 중 1명인 유대인의 나이먹은 아버지가 상황이 심상치않게 돌아간다며 독일을 탈출해야 한다는 아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난 1차대전 때 독일을 위해 싸웠던 참전용사인데 설마 어떻게야 하겠느냐', '진정한 독일 시민이라면 정부의 정책을 믿고 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도리다'라며 가만히 있다가 결국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서 사망한다(...).[36] 다만 이 사람은 1차대전 참전 경험 때문에 같은 참전용사 출신인 히틀러를 지지하고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인물이었다. 유대인이면서도!동족혐오 자신도 유대인이라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유대인이기 이전에 독일 국민'이라고 확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37] 그 당시 유대인들 중에 이러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실화를 베이스로 한 이야기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고는 할 수 있는 셈. 사족이지만 히틀러와 나치는 집권 초기만 해도 대단히 인기가 많았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탄압도 단계적으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른 창작물인 아트 슈피겔만쥐(만화)에서도 아우슈비츠에서 한 유대인이 "나는 저 유대인과 서 있을 수 없소! 나는 독일인이란 말이오! 내 아들은 독일군이고 나는 독일 황제에게 훈장도 받았소!"라고 항의하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아우슈비츠에는 일반 독일인 죄수들도 있긴 했지만, 그 유대인 또한 이렇게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이처럼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 집단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으로 반유대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기 이전까지 서구 문화권 국가 전반에서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고, 이처럼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근세~근대 초중반까지는 오히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유대인을 억누른 다른 지역에 비해 독일 문화권이 오히려 유대인들이 터 잡고 살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던 것부터 생각해야 한다. 일본의 동유럽 문제 전문가이자 작가인 요네하라 마리에 따르면 루마니아 등 원래 독일계 인구 비중이 적은 지역에서는 독일식 성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인식이 퍼져있을 정도로 독일 문화권이 중-동부 유럽의 유태인 사회의 거점이었던 것. 이처럼 상대적으로 차별이나 박해가 덜 한 독일 문화권 지역에서 여러 대에 걸쳐 정착하고 대를 이어 살아온 유대인들이 그 지역 사회에 정착하고, 국가에 대한 소속감 역시 가지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대학살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나치가 정한 유대인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유대인 외모를 가진 자는 유대인으로 규정한다거나 상당수 독일계 유대인은 제외되거나등의 객관성, 일관성은 아예 없는 왜곡 된 기준들이다. 충공깽한 수준. 즉 히틀러는 그저 감정의 희생양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식 영토나 국가가 없어 차후 합법적 보복이 불가능한 만만한 희생양이…만약 유대인이나 집시들이 영토를 가진 정식 국가였다면 종전 후 구체적 피해 금액 요구가 가능해지니깐!

특히 나치 고관들은 자신의 친구나 지인이 유태인이거나 했으면 그들은 학살에서 쏙 빼주기도 했다. 당장 위에 언급된 괘지는 물론이요 그 히틀러마저도! 가령 에듀아드 블로흐(Eduard Bloch)라는 유대인 의사는 히틀러의 어머니를 치료해주고 치료비를 깍아준 적이 있어서 히틀러가 그를 대단히 좋아했다. 1940년까지 히틀러의 특별 보호를 받았고 "모든 유대인이 블로흐 같았다면 유대인 문제는 있을 수가 없다"라는 발언까지 할 정도였다. 블로흐는 유대인 탄압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940년에 미국으로 이주하긴 했지만 재산을 제대로 챙겨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대우를 받았다.

결국 나치 기준으로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조상님들 가운데 유대인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했던 사람도 하루 아침에 유대인으로 찍혀서 끌려가서 살해당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당사자들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편협한 인종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을 때 얼마나 위험하게 변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실 이전에도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있었지만 나치처럼 무조건적 말살을 당연시한 사례는 없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당장 현대 유럽에서 가장 악명높은 극우들조차 무슬림 입국을 거부하자거나 격리시키자고 하지, 학살 같은 이야기를 꺼내면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 취급 받는다. 게다가 유대인과 달리 무슬림들은 지금도 동화를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건 물론 유럽에서 지하드를 하려는 인간들도 심심찮게 나와 실제 위협이 되고 있음에도 그렇다. 즉 나치가 얼마나 돌았는지를 홀로코스트가 증명하는 것이다.

다 집어치우고 유대 사회는 모계 사회이다. 이 원칙은 기원 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에게 완전히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전 세계(특히 유럽)로 흩어지면서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엄마는 누군지 확실히 알 수 있기에 지켜져 왔던 원칙이다. 즉,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남자가 백인 여자랑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자식도 백인들과 결혼해 후손을 낳고 또 낳아서, 유대인 사회를 떠나 유럽 백인 사회 일원의 하나로 정착해버린 경우도 많았다. 유대인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사고쳐서 낳은 사생아들은 어떻게 되는진 궁금해 하지 말자 70년 부터 시작된 유대인 민족 대이동은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기 전까지 무려 186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이뤄졌는데 히틀러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도 가계를 쭉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유대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안 섞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순수 혈통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짬뽕 혈통 유럽 사회에서? 애시당초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순수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민족따위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그건 인구가 부족급 단위로 적고 교류도 없었던 곳에나 가능하지 인구는 몃백만 이상의 광역급+교류의 역사도 있었던 곳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는게 정설이다.

11. 기타

  • 효율적인 인종 청소를 위해 독가스를 사용한 최초의 국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아니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통령이던 당시의 프랑스 제1공화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Claude Ribb이 2005년 저술한 '나폴레옹의 범죄들: 히틀러를 위한 청사진'에 따르면, 1801년 나폴레옹의 명을 받고 출동한 르클레르의 프랑스군은 아이티에서 벌어진 흑인 노예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곤 포로들을 가스실로 개조한 함선의 선창에 처넣어 이산화황으로 질식시켜 죽였다. 그리고는 가스선을 먼 바다로 몰고 나가 시체들을 바다에 갖다 버렸다. 이 학살이 벌어진 이유는 이러하다. 아이티는 프랑스 제1식민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고, 그 핵심에는 아이티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플랜테이션은 노예들을 통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기존의 흑인들을 그대로 놔두면 노예 노동에 방해가 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반란 세대를 모조리 제거하고 자유 민권 사상에 물들지 않은 새 노예들을 아프리카에서 데려오고자 했는데, 한 섬의 인구 전체를 신속하게 말살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연구 끝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가스실 학살법이 고안되었다. 클로드는 그렇게 설치된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은 아이티 흑인들이 10만 명을 상회한다고 주장하였다. 단, 논란은 존재하며 나폴레옹의 가스실 학살의 명백한 근거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때문에 이 주장은 여러 반박을 받아 아직까지는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 유대인을 경멸했는데 유대인의 지방 덩어리를 몸에 닿게 했을 리가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문서 참조.[38]

제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

  •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나치 정권의 범죄 사실에 대해 말하라 하면 홀로코스트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의 희생자 수는 유대인 희생자 수에 근접하며, 소련인들의 사망자 수는 자그마치 2200만 명을 상회한다.[39] 이는 냉전 질서 하에서 잊혀져갔다. 이들의 죽음 또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 아트 슈피겔만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자신의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과 전후 세대인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충격적인 실화가 나오는데 전쟁이 끝난 후 유태인들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는데도 유태인 학살이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는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면서 귀금속과 돈, 돈될 만한 물건들은 나치가 갖고, 가질 수 없는 토지나 집, 공장은 폴란드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전쟁이 끝나면서 유태인들이 돌아오자 유태인들에게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 유태인 집과 토지를 돌려주기 싫었던 폴란드인들은 돌아온 유태인을 집단적으로 죽이거나 추방시켰다. 이런 일들은 전쟁이 끝나 지 1년이 지나서야 폴란드가 안정을 찾자 중단되었다. 다큐멘터리 "아우슈비츠"에서는 살아돌아온 유태인이 고향에 있는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하자 그 유태인집을 차지하고 있던 새 주인은 그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고 보물을 찾기 위해 그 집을 철거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런 일들은 폴란드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지배당하거나 협력했던 모든 국가들에서 있었다.
  • 대체역사소설 당신들의 조국에서는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멈추지 않고 지속되어 유대인 1,100만 명이 살해되고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유대인이란 인종 자체가 전멸했다. 독일인들에게 유대인은 옛날에 분명히 있었는데 왠지 사라진 존재 정도로 거의 잊혔고, 홀로코스트의 존재는 극소수의 나치 간부들만 알고 있다. OMG!
  • 유대인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다. 이와 관련된 음모론도 많지만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
  • 홀로코스트의 최고령 생존자인 앨리스 헤르츠좀머 씨가 2014년 2월 24일에 11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 앞서 언급된 것처럼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다. 동성애자, 집시,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장애인들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특히 집시들은 '포라이모스(Porajmos)'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유명한데, 적어도 80만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많다. 다만 집시들은 유대인과 다르게 홀로코스트가 아니라 군인에 의한 무자비 학살의 대상으로 희생당한 사람도 많고, 정확한 기록이 부족하여 사망자수가 유대인보다 훨씬 부정확하다. 그래도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1944년 8월 2일 하루에만 4,000여 명의 집시들이 학살됐다. 지금도 집시들은 '집시들의 날'을 제정해서 이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 희생에 대한 동정여론은 모두 유대인들에게만 돌아갔고, 독일스위스의 배상금은 유대인 희생자도 아닌 시오니즘 단체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건국비용으로 소모되었다.
  •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로, 희생자들은 5,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주로 게이들이 많이 희생당했다. 전후 배상도 가장 차별받은 케이스였는데, 당시 동성애자들에 대한 유럽의 사회적 시선은 그야말로 시궁창이었기 때문이다.(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한 영국의 앨런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를 받았을 정도다.) 1960년대 후반에야 동, 서독에서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나치는 이들에게 분홍색 역삼각형 문양을 붙였는데, 이것을 뒤집은 분홍색 삼각형은 핑크 트라이앵글(Pink Triangle)이라고 하면서 게이 인권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 대량학살이야 인류역사상 흔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마치 쓰레기를 소각하듯이 수백만 명을 산업적으로 학살한다는 사실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영화와 미디어 사업을 꽉 쥐고 있는 게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단골소재로 나왔다. 물론 같이 핍박받았던 동유럽 사람들의 경우 러시아 영화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소련 붕괴 후 해금된 각종 문서를 통하여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와 같이 비유대계 사람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는 것이 다시금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비슷한 시기 중동에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권탄압이 점점 심해지는 데다가 해외의 유대인들도 이에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병크를 연달아 터뜨려서, "지금의 이스라엘이 과거 나치랑 다를바가 뭐냐."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이다. 덕분에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불쌍한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는 훅 가버려서(…),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가 나오면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는 등 예전만한 평가를 못받는다. 대표적인 예가 디파이언스와 1943년 유대인 게토 봉기를 다룬 업라이징.[40]
  • 최근에 발표된 '정말 600만이 죽었나'라는 책에선 실제론 이수가 매우 부풀려졌다고 주장했다. 최대로 추산해봐야 40만이 넘지 않는다고 하는데…문제는 이거 저자가 영국민족전선(British National Front)의 부의장과 당 기관지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라는 것. 이 영국민족전선은 쉽게 말해서 영국의 네오나치들이다. 정당은 백인만 가입할 수 있고, 정책도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의 이민을 금지한다는 등 극우 파시스트에 인종차별 성향을 보인다. 당연히 이 책에도 객관적인 시각따윈 없고, 그 어떤 역사학자도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 다만 학살자 수에서는 부풀려져 있다는 주장이 위에 네오 나치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들도 제기한 사항이다. 이를테면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도 200~400만 정도로 추정했다는 것. 그런데 학살자 수를 더 늘려서 배상금을 더 받아먹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유태인이자 조부모가 아유수비츠에서 학살당한 노르만 핀켈슈타인이다. 당연히 나치에 대해서는 이를 갈고 있으며 학살극의 존재를 분명히 인정한다. 다만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돈벌기 사업으로 쓰며 피해자 상당수에게 돈을 안 주며 엉뚱한 사람이 가로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핀켈스타인은 <홀로코스트 산업>이라는 책자로 피해 보상금을 일부 시오니즘 극단주의자들 배를 채우게 했다고 비난하며 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나치가 하는 짓을 유태인이 벌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노엄 촘스키 또한 유태인이지만 그도 1950년대 200~400만이 갑자기 수가 늘었다면서 돈 더 달라고 하곤 그걸로 이스라엘 건국과 일부만 배를 채운 더러운 보상금이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 2015년 10월 21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이 히틀러에게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 인사인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네타냐후는 아예 대놓고 팔레스타인 때문에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고 주장해 버린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 국제적으로 비웃음만 받고 묻혀졌다. 미국에서도 이렇더라 보도하고 그랬냐? 넘어갔으며 극단적인 일부 유태인들이나 옹호했을 뿐. 노엄 촘스키는 비웃으며 "아랍 모두가 나치를 지지했다고 늘려서 엉터리 주장해라"고 비난했다.
  • 홀로코스트 여파는 폴란드의 민족구성을 완전히 바꿔 놓을 정도였다. 폴란드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직전만 하더라도 유대인이 약 3백만 명 가량 거주하여 유대인 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일찍 나치 점령지가 되었고, 대규모 수용소를 건립하는 등 가장 혹독하게 학살이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수용소의 굴뚝으로 사라지거나 외국으로 도피했기 때문에 종전 직후에는 이전의 1%인 3만 명조차 남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현재 폴란드는 인구의 대부분이 폴란드계이며 유대인은 극소수인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41]
  • 이러한 유대인 학살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명백한 범죄행위이지만, 그것이 과장됨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은 찜찜한 진실 또한 존재한다. 우선, 독일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 방면, 헤레로족 학살이나 마지마지 운동 당시의 초토화 작전에 관해선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유대인이 상대적으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크다는 점 (반대로 오늘날의 나미비아탄자니아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덜하고 저개발국인 점)과, 유대인 또한 백인인 반면 중남아프리카에는 흑인이 많은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일종의 국가적/인종적 차별이 아닌가, 또한 오늘날 이스라엘이 저개발국이거나 유대인의 영향력이 오늘날처럼 막강하지 않았으면 독일이 진정한 사과를 했을까 의심스러운 면이 있다. 또한 영국 얘기를 하자면,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독일로부터 영국을 구한 윈스턴 처칠은 세계대전 당시,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의 인도 침략을 우려해 벵골 지역의 쌀을 모조리 뺐어가고, 수백만의 벵골 지역의 주민을 굶겨 죽임으로써 학살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인도가 영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처칠은 이를 묵살하고, 미국과 호주가 벵골 지역에 대해 도움의 손길을 뻗었으나 처칠은 상륙 불허로 대답해 무려 700만의 인구를 굶겨 죽인 적이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이 있는 만큼, 만약 독일이 세계대전의 승리자라면, 히틀러 및 고위 간부들은 물론 처칠에 대한 세계의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 반론 : 이것은 왜곡으로 실제로 당시 대기근이 일어난 1943년 일본 해군이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전력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상태로 안전한 수송루트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의 버마 공세로 수송로도 위험한 상황이었다.[42] 심지어 42년에는 작물 병충해와 태풍이 같이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영국 정부도 식민지 인도를 상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43년 9월부터 기아를 막으려고 했으나 탁상행정이었고 이렇게 지원을 온 식량들도 지방 지주와 상인들의 농간으로 매점매석 같은 일도 함께 터져 버렸다. 심지어 위에서 식량 수송을 거부했다는 말과 다르게 처칠은 루즈벨트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주에게 물자지원을 요청했고 전선에 투입되는 물자를 줄여서 기아 대책을 추진했지만 부족해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출처] 물론 윈스턴 처칠과 식민지를 경영하는 영국 정부의 대처가 안일했다는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의도적으로 대기근을 발생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12. 관련 어록

라인강을 건너 독일에 들어서자 갑자기 중세시대에 온 것 같았다. 나는 20세기 대명천지에 그 잔혹한 범죄들이 어떻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 어느 미군병사의 증언[44][45]

여자들과 노인들이 거리에서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우리에겐 아무 힘이 없고 길거리에서 우리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만큼 우리는 고독하다. 우리는 너무나 약하다.

- 폴란드 유대인의 회상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인간은 포유류이지만 동물은 아니다 이런 건가 - 아돌프 히틀러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나의 투쟁

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바뀌었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했던 이 나라와 이곳 사람들이 갑자기 적으로 돌변했다. 나는 더 이상 독일인이 아니었고 독일인이 될 권리조차 없다, 한때나마 이 나라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이곳 사람들에게 품고 있던 믿음이 부끄럽다, 그들은 가면을 집어던지고 잔인한 적의 얼굴을 드러냈다. - 에드빈 란다우[46]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 신원미상의 독일인[47][48]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49]

“캠프에서의 첫날 밤은 절대로 잊지 못한다. 나의 인생을 긴 밤으로 물들여버린 그날, 일곱 번 저주하고 일곱 번 회개했다...나의 신을 죽이고, 나의 영혼을 짓밟고, 내 꿈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 절대로 이것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내가 신만큼 오래 산다고 해도.”

- 엘리 비젤, 노벨평화상 수상자[50]

이미 일어난 사건은 바꿀 수 없다. 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를 통해 배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깨닫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안네 프랑크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

"나 혼자 돈을 내게 된 상황을 뭐라고 할까요?[51]"

- 구글 어시스턴트, 구글의 비서형 인공지능

13. 홀로코스트를 다룬 매체

14. 관련 문서


  1. [1] 원래 유대교 등에서 제물을 태워서 신에게 바치는 의식인 번제를 의미하는 단어. 이 항목과 같이 나치의 집단학살을 의미하는 경우 거의 항상 첫글자를 대문자로 쓴다.
  2. [2] A figure of 26.3 million is given in Service d'Information des Crimes de Guerre: Crimes contre la Personne Humain, Camps de Concentration. Paris, 1946, pp. 197–198.
  3. [3] Christopher Hodapp, Freemasons for Dummies, 2005; Raul Hilberg, 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 2003; Martin Gilbert, Atlas of the Holocaust, 1993; Israel Gutman, Encyclopedia of the Holocaust, 1995.
  4. [4]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지만, 일본 제국이 승전국에 끼었기 때문에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호응을 받지 못해 일본군에게 진압당했다.
  5. [5]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문서에서 보면 나와 있듯이, 바이마르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할 여력이 되지 않자 결국 거의 다 삭감해주었다. 보상금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미국영국의 경우고, 육지로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계속 대립했던 프랑스는 삭감안에 반대했고 결국 삭감되지 않았다.
  6. [6]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대인이었다.
  7. [7] 사실 동부전선에서의 포로 및 민간인 학살도 소름 끼칠 만큼 체계적이었다.
  8. [8] 사실 그들 나름의 이유는 있었지만 그것 자체도 매우 비논리적이었고 비현실적이었다. 게다가 말기에 가면 학살을 해서 얻는 이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살에 집중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
  9. [9] 이것이 정책적으로 벌어진 것.
  10. [10] 여기에는 별의별 이유가 다 들어갔다. 오늘의 일과는 유태인 하나를 죽이고 끝낸다든가. (아트 슈피겔만의 참조.)
  11. [11] 일부는 연합군의 판단 착오로 사망하기도 했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당시 의학에 무지한 병사들이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줘서 신체에 충격을 받은 수감자들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이는 몇몇 미디어에서도 묘사되는데 단순히 연합군 측에서 수용소의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을 알고 보면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다.
  12. [12] 홀로코스트의 원인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의도주의적 해석은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상층부의 의도에 따라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고, 기능주의적 해석은 기존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부추김을 받아 독일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계획대로 vs. 어쩌다보니.
  13. [13]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현실은 저 두 가지 요인의 합작이었고 학자들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쪽이 더 크냐의 논쟁일뿐.
  14. [14] 직접통치지역이었던 독일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같은 데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태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심지어 이들 두 나라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적극 보호했다.) 벨기에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 나치와는 별개로 현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학살, 탄압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곳도 있었다.
  15. [15]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은 이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논점. 여기서 유대인이란, 혈통보다는 신앙 측면에서 "예수를 못박은 세력의 가르침을 아직도 따르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했다. 즉 중세때는 유대인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냥 기독교인으로 간주했다.
  16. [16]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
  17. [17] 당시 나치 군체계의 언어로 '최종 해결책'과 '물리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유대인 학살을, '정치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국외 추방을 의미.
  18. [18]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19. [19]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
  20. [20] 이 사람은 나중에 칠레탈출한다.
  21. [21]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해도 물자 수송에 있어 의 비중은 매우 컸다.
  22. [22] 훗날 전범 재판에서 이게파르벤은 치클론 B를 학살용으로 공급한 것 아니냐는 추궁에 자신들은 살충제로 팔았을 뿐이라고 변명했지만, 이 변명은 씨알도 안 먹혀서 이게파르벤은 해체되었다. 전술했다시피 다른 참여 기업들과 Degesch(1986년 Detia Freyberg에 합병되어서 Detia-Degesch라는 사명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사는 살려두었지만 Tesch und Stabenow사는 주요 인물인 브루노 테슈의 죄질이 너무나도 흉악했으므로 아예 강제로 청산시켜 버렸다.
  23. [23] 홀로코스트 산업 - 노먼 핑켈슈타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 나치 대학살 - 최호근에서 인용.
  24. [24] 독일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철학, 사회과학 연구자들의 그룹으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막스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에리히 프롬, 레오 뢰벤탈 등이 있었으며, 위르겐 하버마스, 클라우스 오페, 알프레드 슈미트 등 2세대 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 대다수가 유대계라서 나치시기에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으며, 전후에는 68혁명을 비롯한 신좌파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25. [25]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설 개시 단계부터 장기간 소장을 지냈던 루돌프 회스(루돌프 헤스와 스펠이 다르다. 회스(Höß)다.)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희생자를 처음엔 250만 정도(실려온 사람 숫자가 유대인만 250만으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을 조금 넘는 숫자로 정정했다. 1946년 봄에 처음 진술할 때에는 상관에게 들은 수치였고, 이후 1946년에 진술을 정정할 때는 폴란드 법정에 제출할 자술서 성격의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수용소 처리능력과 자신이 기억하는 실제 처리량을 비교해 본 결과 150만 이상은 수용소에서 죽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정정한 것이다. 회스의 진술 신뢰성은 상당히 높아, 현재는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살해된 인원을 약 15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것이 정설이다.
  26. [26]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는 2005년에 건립되었고,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성소수자 단체가 추진해 2008년에 완공되었다. 연속성을 노린 것인지 동성애자 홀로코스트 추모비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의 콘크리트 비석 1개와 동일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졌다. 다른 점이라면 조그만 창이 하나 달려있는데, 창 안을 들여다보면 내부 모니터에서 동성커플의 키스 장면이 들어간 영상이 재생된다.
  27. [27] 특히 박물관 건립에 기부금을 낸 사람들
  28. [28] 전에 있었던 서술의 반 이상은 네오 나치 및 음모론 사이트 외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내용이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가급적 출처가 확실한 자료만 기재하길 바람.
  29. [29] 말이 좋아서 군사조직이지, 사실 테러리스트 집단이었다.
  30. [30]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이런 분류를 1942년에 나치가 시작했다는 것이다.
  31. [31] 핀켈슈타인의 또 다른 저서인 <우리는 너무 멀리갔다> 에서도 가자지구 분쟁에 관해 서술하며 홀로코스트를 겪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상대로 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가 이스라엘 정부의 눈에 거슬렸는지 모국인 이스라엘 입국이 금지당했다.
  32. [32] 사실 홀로코스트가 비판 받는 이유는 산업적인 방법으로 학살을 했기 때문에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 비교되는 것이다
  33. [33] 원작자(?)는 19세기 후반 반유대주의자이며 오스트리아 빈 시장 칼 루에거. 빈에 오래 살던 부유한 유대인은 괜찮고 동유럽 이민자 출신 유대인만 박해하겠다는 뜻이다. 괴링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괴링이 아끼는 부하인 에르하르트 밀히가 유대인이라는 논란에 휩싸였기 대문이다.
  34. [34] 나치 독일 시절의 민간인들은 수용소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그것이 진짜 있는지는 몰랐다.
  35. [35] 사진에서 포토샾으로 제복을 지우고 그냥 티셔츠 하나 입혀놓은 뒤 일본인이라고 속여도 속아 넘어가는 수준이다. 독일인이라면서 엄청나게 일본인답게 생겼다.
  36. [36] 실제로 유대계 독일인들중 1차대전때 참전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독일내 유태계는 약 5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10만명이 1차대전에 참전했으며 18000명이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치는 그들이 참전을 했든 안했든 신경을 안 쓰고 그냥 죄다 유대인으로 취급해서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https://en.wikipedia.org/wiki/German_Jewish_military_personnel_of_World_War_I
  37. [37] 이런 정서는 19세기에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졌는데, 시오니즘의 아버지 테오도르 헤르츨조차 젊을 때 합스부르크에 충성하는 독일민족주의자로서 "중부유럽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주류사회에 편입하여 선진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38. [38]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 중 1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시체에 휘발유를 뿌려 불태우면서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을 다시 퍼부어 더 잘 타게 했다는 말은 있다.
  39. [39] 참고로 중화민국의 희생자 수도 2000만 명 가량 된다.
  40. [40] 하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의 경우 같은 홀로코스트를 주요 내용으로 삼았지만 일방적으로 유대인 옹호와 나치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열한 유대인', '좋은 독일인' 등보다 작품을 입체적이고 중립적으로 만들어 놓아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41. [41] 더 결정적으로, 독일계 주민들이 독일 영내로 추방당하고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2차 대전 전까지 이 두 민족은 폴란드의 주된 소수 민족이었다.) 거주 지역이 소련에 넘어가면서 폴란드인이 97%를 차지하는 거의 단일 민족 국가가 되어 버렸다
  42. [42] 해당항목을 보면 42년 1월부터 43년 5월까지 추축군이 인도양에서 약 87만톤의 영국과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다고 나온다.연합군도 43년 1월이 되어서야 카사블랑카 회담을 통해서 전쟁물자 투입과 연합군 장병들의 투입 비율을 조율하는 카사블랑카 회담을 열었다. 즉 43년 기준이면 연합군이 반격을 막 시작할 때였다. 일본 해군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44년이었다.
  43. [출처] 43.1 Churchill and Roosevelt, Volume 3: The Complete Correspondence, Warren F. Kimball, 117p
  44. [44] 알기쉬운 세계 제 2차세계대전사 중.
  45. [45] 실제로 대부분의 학살 수용소는 독일 영토에 세워졌고, 그 외에 일부가 폴란드에 세워졌기에 외부에 알려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설마 홀로코스트 같은 조직적 말살이 이뤄질 거라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직적인 말살 시설이 있다는 것이 비밀이었을 뿐이고, 유대인을 끌고 가서 죽인다는 건 유럽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46. [46] 동프로이센에서 큰 가게를 운영했던 유대인으로 팔레스타인으로 이민가기 전에 쓴 글.
  47. [47]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다. 직접적인 수용소 관리야 나치에 충실한 자들이 맡았지만 외곽 경비 등은 일반 독일군 병사들을 시켰다. 자세한 건 몰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략 짐작은 가능했다.
  48. [48] 관련 서적들을 보면 "소각연기가 마을 쪽에 나오지 않게 해달라" 등의 민원기록들이 남아 있으며 쉬쉬하지만 다들 알 건 아는 상황임을 충분히 방증하고 있다.
  49. [49] 학살을 방조내지는 동조했던 민간인들을 제3자인 미군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
  50. [50] 1928~2016 실제로 아우슈비츠 수용소 비극을 통해서 양친과 여동생과 사별하였던 아픔이 있으며 그 비극담을 통해서 '흑야(원제 : NIGHT)'와 '새벽(원제 : DAWN)'을 펴냈다. 국내에서는 가톨릭출판사에서 한국어 번역본으로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인을 죽여야 한다느니 발언으로 결국 네놈도 나치랑 비슷해졌다는 비난을 받았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이 서독을 방문하여 2차대전 참전군인 추모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에 대한 숭배라고 비난하다가 미국에서도 나치가 아니라 강제 징병당해 나가 싸워야하던 이들을 추모하는 묘지를 참배한 것을 나치라고 하다니? 아예 독일인 모두를 나치라고 다 죽이자고 할 거냐는 비난을 듣었다. 이러다보니 노벨평화상 수상이 잘못되었다고 비난도 많이 듣었다. 그런 가운데 2000년에는 버나드 매도프의 사기로 수백억이 넘는 재산을 다 잃는 등 늘그막을 고생하다가 2016년 7월 2일 병사했다.
  51. [51] 정답:홀로코스트.
  52. [52] 홀로코스트를 맞먹을 정도로 장애인을 대상으로 잔인하게 죽인다.
  53. [53] 사실 이쪽도 나치에 빌붙었던 세력이니 간접적인 나치즘 홀로코스트라고 볼 수 있다.
  54. [54] 홀로코스트를 체험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이 고안한 심리치료 기법이다.
  55. [55]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이에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후에 노벨평화상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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