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마누엘 산토스


노벨평화상 수상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장 앙리 뒤낭
프레데리크 파시

엘리 뒤코묑
샤를 알베르 고바

윌리엄 크리머

국제법학회

베르타 폰 주트너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르네스토 모네타
루이 르노

클라스 아르놀드손
프레드리크 바예르

데스투르넬 드 콩스탕
오귀스트 베르나르트

국제평화국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토비아스 아서르
알프레트 프리트

일라이휴 루트

앙리 라퐁텐

수상자 없음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수상자 없음

우드로 윌슨

레옹 부르주아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칼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프리드쇼프 난센

수상자 없음

오스틴 체임벌린
찰스 도스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아리스티드 브리앙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페르디낭 뷔송
루트비히 크비데

수상자 없음

프랭크 켈로그

나탄 쇠데르블룸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제인 애덤스
니컬러스 머리 버틀러

수상자 없음

노먼 에인절

아서 헨더슨

카를 폰 오시에츠키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카를로스 사베드라 라마스

로버트 개스코인 세실

난센국제난민 사무국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국제적십자사

코델 헐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에밀리 그린 볼치
존 모트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

수상자 없음

보이드 오어

랠프 번치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레옹 주오

알베르트 슈바이처

조지 C. 마셜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

수상자 없음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수상자 없음

레스터 B. 피어슨

도미니크 조르주 피르

필립 노엘 베이커

앨버트 루툴리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다그 함마르셸드

라이너스 폴링

국제적십자사

마틴 루터 킹

국제연합아동기금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수상자 없음

르네 카생

국제 노동 기구

노먼 볼로그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빌리 브란트

수상자 없음

헨리 키신저
레득토 (수상 거부)

숀 맥브라이드
사토 에이사쿠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베티 윌리엄스
마레드 코리건

국제앰네스티

안와르 사다트
메나헴 베긴

마더 테레사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국제연합 난민고등판무관실

알바 뮈르달
알폰소 가르시아

레흐 바웬사

데즈먼드 투투

핵전쟁방지국제의사회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엘리 비젤

오스카 아리아스

유엔 평화 유지군

14대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아웅산수지

리고베르타 멘추

넬슨 만델라
프레데리크 데클레르크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조지프 로트블랫
퍼그워시 회의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카를루스 벨루
조제 하무스 오르타

지뢰금지국제운동
조디 윌리엄스

존 흄
데이비드 트림블

국경 없는 의사회

김대중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국제연합
코피 아난

지미 카터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국제원자력기구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그라민 은행
무함마드 유누스

앨 고어
기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

마르티 아흐티사리

버락 오바마

류샤오보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엘런 존슨 설리프
리마 보위
타우왁쿨 카르만

유럽 연합

화학무기 금지기구

말랄라 유사프자이
카일라시 사티아르티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2017년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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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후안 마누엘 산토스

핵무기 폐기 국제운동

드니 무퀘게
나디아 무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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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제32대 대통령
Juan Manuel Santos
GColIH GCB GC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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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Juan Manuel Santos Calderón
후안 마누엘 산토스 칼데론

출생일

1951년 8월 10일

출생지

콜롬비아 보고타

국적

콜롬비아

학력

산 카를로스 고등학교 (졸업) (-1967년)
해군사관생도학교 (1967년 입학)
캔자스 대학교 (경제학, 경영학 / B.Ec.)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경제학 / M.S.) (-1975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공공정책대학원 (행정학 / M.P.A)

가족

배우자
실비아 론도노 (이혼)
마리아 무네라 (1987년 결혼)
슬하: 2남 1녀

약력

Inter-American Dialogue 부회장
터프츠 대학교 플레처 스쿨 대학원 객원교수 (1981년)
콜롬비아 해외무역부장관(1991년 –- 1994년)
콜롬비아 재정신용부장관 (2000년2002년)
콜롬비아 국방부장관 (2006년2009년)
태평양 동맹 의장
콜롬비아 제32대 대통령 (2010년2018년)

정당

[[국민연합사회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A500; font-size: .8em"

국민연합사회당}}}]]

재임기간

2010년 8월 7일 ~ 2014년 8월 7일
2014년 8월 7일 ~ 2018년 8월 7일

직업

정치인, 엔지니어

종교

로마 가톨릭

콜롬비아군 복무

국가

콜롬비아

근무

콜롬비아군 해군

복무

1967년 - 1971년

1. 개요
2. 생애
3. 정치 활동
4. 대통령 임기

1. 개요

콜롬비아의 정치인으로, 2010년부터 2018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소속 정당은 국민통합사회당이다.

2. 생애

1951년 보고타에서 태어났다. 산 카를로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7년도부터 1971년도까지 카르타헤나에서 해군으로 복무했다.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가 캔자스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졸업 이후에는 영국 런던에서 커피회사를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1]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가족이 엘 티엠포라는 신문사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미국 유학 시절 산토스 대통령은 이 회사의 부회장을 지낸 적이 있었다. 1988년 졸업한 이후 콜롬비아로 귀국했다.

3. 정치 활동

이후 자유당에 입당했으며, 1991년 세사르 가비리아 당시 대통령에 의해 해외무역부[2] 장관으로 임명되어 1994년 가비리아가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 1998년 안드레스 파스트라나가 집권하면서 정권이 보수당으로 교체되었지만, 2000년 재무세평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파스트라나가 퇴임할 때까지 재직했다.[3] 아무래도 엘 티엠포가 보수당 산하의 언론이다보니, 이 인연 때문에 상대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장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유당이 에르네스토 삼페르 정권을 시작으로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보수당 또한 파스트라나가 별로 못한덕택에 둘 다 서서히 망하기 시작했다. 이 때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이 자유당을 탈당하고 콜롬비아 제일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하여 당선되었는데, 2006년 우리베가 재선에 도전하자 이를 1년 앞두고 산토스 대통령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국민통합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콜롬비아 제일과 연대했다. 어떻게 보면 철새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대한민국과는 달리 중남미에서는 당적 변경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이다.

어쨌거나 우리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재임 중 일명 "위정 스캔들"이 터졌고,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우리베 정권은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었다. 다만 우리베가 안보를 강조했던 탓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만은 면했다.[4] 우여곡절 끝에 산토스 대통령은 2009년 장관직을 사임했고, 이 무렵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었으나, 본인은 고사했다. 당초 여론은 우리베의 3선을 원했고, 산토스 대통령 또한 이를 지지했기 때문.

하지만 3선은 법적으로 금지된 일이었다. 정 하고 싶으면 개헌이 필요했는데, 일단 국회에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이 남았던 상황이었으나 문제는 그게 위헌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베 대통령은 이러한 헌재의 판결을 수용했고, 산토스 대통령은 이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2010년 5월 30일 1차 투표에서 46.68%를 얻어 21.51%를 득표한 녹색당안타나스 모쿠스와 함께 결선에 진출했다. 당초 여론조사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상당수가 모쿠스의 승리를 점치는 등 누가 당선될 지 모르는 선거였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산토스가 69.13%를 얻은 반면, 모쿠스는 27.47%밖에 득표하지 못 해 논란이 되었다. 어쨌거나 산토스 대통령은 큰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4. 대통령 임기

2010년 8월 7일경 취임하였다. 집권 초기 베네수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지만, 이를 빠르게 해결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우리베 대통령이 자당을 해체하고 국민통합사회당에 입당했을 정도.

그러나 재직 중에 산토스 대통령은 FARC와 평화협상을 벌이기로 하면서 우리베 대통령과 마찰이 빚어지게 되었고, 결국 우리베 대통령이 2013년 탈당하고 민주중도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5] 그리고 2014년 대선이 다가오자 민주중도당은 오스카르 이반 술루아가를 후보로 내세우면서, 여권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상당한 초접전을 벌였으나, 술루아가를 가까스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6] 이 점에 있어서 에콰도르레닌 모레노가 훨씬 우월하다[7]

하지만 2기 때는 1기와는 달리 별로 좋은 소리를 듣지 못 했다. 2014년을 기점으로 원자재값 폭락으로 콜롬비아의 경제가 침체에 빠진데다가 1기 때부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의 대립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줄곧 강조했는데, 2016년 이를 국민투표로 부쳤으나 단 1% 차이로 부결되면서 앞날이 깜깜해졌다. 하지만 일부를 수정한 평화안으로 대신 협상에 들어갔고, 이것이 기어이 성사되면서 산토스는 201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허니문은 오래 가지 못 했다. 평화 협상이 타결되자 민주중도당을 중심으로 크게 반발이 일어났고, 여론도 썩 좋지 못한 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 FARC 지도자인 티모첸코가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상황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2018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중도당의 후보로 선출된 이반 두케 후보가 평화 협정 파기를 공약으로 내걸면서 불안감이 퍼지고 있는 상태. 거기에다가 FARC 내에서도 일부가 이탈하면서 현재도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진행중이며, 에콰도르 기자 2명이 FARC 이탈조직 단원들에게 피랍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그간의 공로도 깨지고 있는 상태.

여하튼 2기 집권기 내내 지지부진한 경제적인 상황도 있고해서 3선 금지 조항에 따라 2018년 8월 7일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국민통합사회당은 차기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기로 했고, 대신 무소속 후보인 헤르만 바르가스 예라스를 지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초반만 해도 희망으로 불리던 바르가스의 지지율은 급격하게 추락했고, 한때 지지할 것으로 보였던 자유당의 움베르토 델 라 카예의 지지율은 끽해봤자 5% 내외에 그치면서 망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우파와 좌파 성향 유권자들이 각각 민주중도당의 이반 두케 후보와 보고타 시장을 지낸 무소속 구스타보 페트로로 쏠리면서 결선에 진출했고, 이반 두케 후보가 약 54%로 여유있게 당선되었다. 이반 두케 후보는 결선에 오르면서 평화협정 자체를 파기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이다.

2018년 8월 4일 베네수엘라대통령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암살당할뻔한 일이 벌어지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괜히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의 음모로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말을 해서 후안 마누엘 산토스를 벙찌게 했다.[8] 이에 대해 후안 마누엘 산토스는 베네수엘라가 망하든 말든 잘되든 말든 아무 신경 안쓰며 베네수엘라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 손녀의 세례식이 더 중요하다며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9]


  1. [1] 공공정책 전문대학원
  2. [2] 2002년 무역산업관광부로 확대·개편되었다.
  3. [3] 2000년 8월 7일부터 2002년 8월 7일까지 재직했는데 정확히 2년이다. 보통 장관은 임명 문제 등이 걸리기 때문에, 저렇게 정확히 몇 년을 지내는 것은 매우 드문 일.
  4. [4] 사실 우리베는 현대 콜롬비아에서 반군소탕을 목적으로 이런저런 인권탄압이나 야당인사를 불법적으로 사찰하는 짓거리를 벌여서 이래저래 인권단체들로부터 욕을 많이 먹은 대통령이었고, 다른 국가에서 마약소탕전을 벌인다고 콜롬비아에 대한 지원을 해주었을때 우리베가 지원의 일부를 야당인사를 사찰해서 정국을 유리하게 끌고가거나 정부군과 정부와 협력하는 민병대 소속에 불리한 증언을 할만한 인물들을 살해하는데 썼던탓에 미국조차도 이런 행각에 경악을 금치못해서 임기말에는 지원을 끊을 정도였다. 다만 국제적으로 우고 차베스나 룰라가 더 언급되다보니까 상대적으로 언급이 덜했던데다가 비록 과정이 더럽기는 했어도 치안이 어느정도는 괜찮아진건 사실이었었고, 복지를 빵빵하게 해주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원자재값 상승으로 경제도 나름대로 괜찮아지기는 했기 때문에 임기말에도 인기는 높았고, 퇴임후에도 여러모로 구설수가 많기는 해도 이때 다져놓은 지지층들이 많기때문에 입지를 지킬수있었다.허나 그럼에도 위낙 한짓이 많아서 2018년 이반 두케의 취임을 앞두고 대법원에서 위증과 학살사건에 대해서 조사를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재판이 각하되어서 겨우 입지를 지킬수있었다.
  5. [5] 이름만 보면 중도 정당처럼 보이겠으나 실제로는 극우에 가깝다.
  6. [6] 참고로 한때 산토스가 소속되어 있던 자유당은 이 대선에서 창당 이후 사상 처음으로 후보를 내지 않았는데, 대신 국민통합사회당과 연대했다. 그만큼 자유당이 망한 것.
  7. [7] 레닌 모레노는 라파엘 코레아의 지지층의 반절 이상을 흡수하면서도 야권과의 대화로 야당 지지층을 상당수를 흡수한 덕택에 효율적으로 라파엘 코레아의 정치생명에 타격을 입히고 있는 중으로 라파엘 코레아의 고정 지지율 자체는 20% 가량으로 적지는 않지만 레닌 모레노가 야권 지지층 상당수의 지지를 확보한데다가 에콰도르의 정치환경이 콜롬비아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보면 2:1로 우월한 상황이다.
  8. [8] 다만 후안 마누엘 산토스 본인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재제를 주장하고, 임기 막판에 나토가입에 앞장섰다는 점이나 콜롬비아 마피아들이 베네수엘라 산 석유나 생필품을 값싸게 밀수하는 일에 대해 단속을 하나마나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앙금이 쌓일 일이 충분히 많기는 했다. 물론 콜롬비아 입장에서야 베네수엘라산 석유를 값싸게 구입할수있기 때문에 어차피 콜롬비아의 일이 아니기때문에 베네수엘라의 국부가 유출되는건 그 다음이지만.
  9. [9] 그럴만도 했던게 퇴임직전에 라파엘 코레아이 RT에서 진행하는 토크쇼에 멀쩡히 출연했기도 했을정도로 좌파 성향의 대통령들하고도 아주 절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이가 나쁜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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