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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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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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2회

3회

4회

5회


1930
우루과이


1934
이탈리아


1938
프랑스


1950
브라질


1954
스위스

6회

7회

8회

9회

10회


1958
스웨덴


1962
칠레


1966
잉글랜드


1970
멕시코


1974
서독

11회

12회

13회

14회

15회


1978
아르헨티나


1982
스페인


1986
멕시코


1990
이탈리아


1994
미국

16회

17회

18회

19회

20회


1998
프랑스


2002
한국/일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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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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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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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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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Fussball-Weltmeisterschaft 1954 Schweiz
Championnat du Monde de Football 1954
Campionato mondiale di calcio 1954
Campiunadis mundials da ballape 1954
1954 FIFA World Cup Switzerland™

대회기간

1954년 6월 16일 ~ 1954년 7월 4일

개최국

스위스

공인구

스위스 월드 챔피언
(Swiss World Champion)

참가팀

16개국

대회 결과

우승

서독
(1번째 우승)

준우승

헝가리

3위

오스트리아

4위

우루과이

수상

골든볼

페렌츠 푸스카스 (헝가리)

골든슈

산도르 코츠시스 (헝가리)

이전·이후 대회

1950년
브라질

1954년
스위스

1958년
스웨덴

1. 개요
3. 경기장
4. 본선
4.1. 조별 리그
4.1.1. 대한민국 대표팀의 시련어린 도전
4.2. 토너먼트
5. 결과
6. 기록실
7. 기타

1. 개요

1954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5번째 FIFA 월드컵. 193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만에 유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이다. 개최지 결정은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결정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FIFA 창설 50주년을 맞이하는 대회이니 FIFA의 본부가 있는 스위스에서 개최하자는 거였지만, 사실은 유럽 대륙 대부분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쑥대밭이 되어서 유럽 국가 중에 그나마 대회를 개최할 여력이 있는 나라는 2차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위스 뿐이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개최한 것이다.[1] 실제로 1946년 월드컵을 아르헨티나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전쟁복구 문제 때문에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참가 신청을 하지 못해서 월드컵 대회 자체가 취소된 전례도 있었다.

이 대회에서부터 최초로 TV 중계가 이루어졌으며, 지난 대회와 마찬가지로 16개국 체제가 고착화되었는데, 대신 기권팀이 3개국이나 되었던 지난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기권팀이 전무하여 진정한 의미의 16개국 체제가 완성되었다. 사실상 현대 월드컵의 시조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대회부터 전범국가인 서독동독, 일본의 출전금지가 해제되었다.

26경기에서 총 140골이 쏟아져 나와 경기당 5.38골을 기록한 다득점 대회로 기록되었다. 월드컵 역대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인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7:5 경기도 이 대회에서 나왔다. 그야말로 공격축구가 찬란히 만개했던 대회. 특히 매직 마자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헝가리는 한국을 9:0으로 개발살내는 등 5경기에서 27득점을 기록하는 흠좀무스러운 공격력을 과시했다.[2]

또한 스위스는 이 대회에서 무려 10실점을 헌납하면서 개최국 최다 실점 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60년간 이어져오다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서 개최국 브라질이 통일한 독일에게 1:7로 완패하는 등 한 대회에서 14실점을 허용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이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기념비같은 대회였으며, 그 후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본선 진출을 한 대회였다.[3]

2. 지역예선

개최국 스위스와 전대회 우승국 우루과이가 자동진출권을 확보하고 나머지 14개 티켓을 두고 총 37개의 참여국을 13개 조로 나누어 각조 1위에게 본선 진출권을 부여했다. 다만, 영국 홈네이션만으로 구성된 3조는 FIFA의 우대정책이 계속되어 조 2위도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항목 참조.

3.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총 6개의 도시와 구장에서 열렸다.

  • 로잔 - 스타드 올림피크 드 라 퐁테즈 (Stade Olympique de la Pontaise) (50,300명)
  • 루가노 - 스타디오 디 코르나레도 (Stadio di Cornaredo) (35,800명)
  • 바젤 - 슈타디온 반크도르프 (Stadion Wankdorf) (64,600명)
  • 베른 - 장크트 야코프 슈타디온 (St.-Jakob-Stadion) (54,800명)
  • 제네바 - 스타드 드 샤르밀 (Stade de Charmilles) (35, 997명)
  • 취리히 -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Hardturm Stadion) (34, 800명)

4. 본선

/조별 리그 1조&2조

/조별 리그 3조&4조

/8강 이후

4.1. 조별 리그

1954년 대회 조별리그는 꽤 특이한 방식을 도입했는데, 조별 풀리그가 치루지 않고 상위 시드 2개국, 하위 시드 2개국으로 나누어 각팀당 2경기씩만 치루게 하여 조별로 4경기씩만 치뤄진다. 한국이 속했던 2조의 예를 들면 당시 조 상위 시드는 헝가리와 터키였고 하위 시드는 한국과 서독이었다. 상위 시드 팀끼리 그리고 하위 시드 팀끼리는 대결하지 않고 상위 시드 팀과 하위 시드 팀이 서로 대결하게 했다. 그래서 헝가리와 터키는 한국, 서독과 경기를 하게 되고 한국과 서독은 헝가리, 터키와만 경기를 하게 된다. 헝가리와 터키는 서로 경기를 하지 않고 한국과 서독은 서로 경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첫 월드컵때 한국이 서독과 같은 조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고도 순위 결정이 나지 않으면 최종 순위 결정전을 치뤄 2위를 결정짓는 방식인데, 이 방식은 결국 1회용으로 사장되고 말았다. 또, 조별리그에서도 전후반 90분에서 무승부가 나오면 연장전까지 치뤘고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안나면 무승부로 기록했다.

상위 시드 팀과 하위 시드 팀은 다음과 같다.

  • 상위 시드 : 오스트리아, 브라질, 잉글랜드, 프랑스, 헝가리, 이탈리아, 터키[4], 우루과이
  • 하위 시드 : 유고슬라비아, 멕시코, 서독, 대한민국,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스위스, 벨기에

조별 리그

1조

브라질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멕시코

2조

헝가리

서독

터키

대한민국

3조

우루과이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4조

잉글랜드

스위스

이탈리아

벨기에

  • 1조에서는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가 사이좋게 1승 1무로 진출했다.
  • 2조에서는 악마의 왼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세계 최고의 공격수 페렌츠 푸스카스를 앞세운 매직 마자르 헝가리가 대한민국을 9:0, 서독을 8-3으로 떡실신시키는 위엄을 보이며 손쉽게 8강에 선착했다. 서독은 대신 터키를 잡아 1승 1패, 한국을 7:0으로 꺾고 헝가리와 경기가 없던 터키와 1승1패로 동률, 순위결정전에서 터키를 다시 7:2로 꺾으며 8강에 합류한다. 서독은 한국과 경기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한국은 2전 2패로 대회를 마감한다.
  • 3조에서는 우루과이와 오스트리아가 사이좋게 2승을 거두며 8강에 진출했다. 우루과이는 스코틀랜드를 7:0으로 밟았고, 오스트리아도 스코틀랜드에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
  • 4조에서는 잉글랜드가 벨기에와 4:4로 비기며 암울하게 출발했으나 홈팀 스위스를 2:0으로 격파, 축구종가의 자존심을 지키며 본선에 직행했다. 반대로 홈팀 스위스에 지고 벨기에를 대파한 이탈리아는 스위스와 최종 순위결정전을 치뤘는데 여기서 패하며 광탈…. 스위스는 개최국 2라운드 진출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4.1.1. 대한민국 대표팀의 시련어린 도전

대한민국 대표팀은 아시아 중에서는 두번째로 월드컵 본선 진출국이라는 영예를 안고 출전했으나, 1차전에서 헝가리를 만나 0-9로 대패하고 만다. 결과만 놓고 보면 졸전을 치렀거나 아시아와 세계의 축구 수준 차이를 실감했을 뿐일지도 모른다.사실 후자가 맞기는 하다.

그러나 사실 대한민국이 헝가리를 상대로 0-9까지 막아낸 것은 예상 밖으로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었다! 그것도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사인한 지 11개월만의 일이다.

우선 당시 상대였던 헝가리 축구의 위상을 보자면, 이 무렵 축구 종주국이자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조차도 대회 직전의 평가전에서 헝가리에 7-1로 영국이 압살당했던 데다가[5], 당장 이 월드컵 대회 조별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해있던 팀이자 대회 우승국인 서독도 헝가리를 상대로 예선 1위를 하는 건 손해라 판단하고 2군들을 내보내 3-8로 참패했고, 헝가리는 토너먼트 8강전과 4강전에서도 브라질우루과이 등의 강팀을 만나서도 각각 4골씩 때려박으며 손쉽게 제압하고 결승까지 올랐다. 따라서 그만큼 이 대회의 당시 헝가리 대표팀의 전력은 가히 지구방위대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으니, 애초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력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6]

게다가,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유효슈팅이 무려 100개가 넘었다. 100개 중에 9개가 들어갔으니 헝가리의 유효슈팅 10개에 1골쯤 들어간 셈인데, 당시 대한민국의 골문을 지켰던 홍덕영 골키퍼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훨씬 더 많은 골을 허용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임이나 실제로 축구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저 정도의 유효 슈팅을 하고서 실제 골이 저 정도밖에 안 들어갔다는 건, 전력 상황과 경기 상황을 비교해보면 그야말로 기적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참고로, 비슷하게 경기중 8개 골이 들어갔고, 공격 뿐 아니라 수비의 질도 아주 높은 미네이랑의 비극 당시 독일과 브라질 대표팀은 합쳐서 25개의 유효슈팅 중 8개의 골을 넣었다. 유효 슈팅당 골 성공률은 이처럼 두자리수는 가뿐히 넘기며, 경기의 질에 따라 20~30%는 충분히 왔다갔다한다. 그런데, 당대 최강 팀이 당대 최약체 팀에게 한자릿수 유효슈팅 득점율을 만들어낸 것이다.

심지어 홍덕영 골키퍼는 이 경기에서 헝가리의 무지막지한 슈팅 공세를 막아내다 온몸이 멍투성이가 된 데다가 갈비뼈까지 부러졌다. 경기가 끝나고 일부 관중들이 이러한 활약에 감동하여 홍덕영 골키퍼에게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이날 경기에 대해 "푸스카스의 슛은 정말 강해서 위잉 소리가 났고, 맞으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라고 훗날 회고한 바 있다. 게다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공을 잡으면 고의로 밖으로 차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을 밖으로 차낸 경우 다시 가져올 때까지 경기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해외 언론은 헝가리의 20-0 대승 또는 그 이상을 예상한 곳도 많았다. 심지어 당시 기록영상만 봐도 외국기자들이 경기 도중 드러누워 잘(...) 정도였다. '취재할 거 있어? 아주 학살당하겠지. 깨면 취재나 하자고.'라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되려 나중에 "겨우 9-0으로 이겼어?"라며 크게 놀랐다고 한다.[7]

쉽게 말해 지금 상황으로 비유하면 남수단이나 소말리아 같은 내전에 시달리는 세계 최빈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 프랑스나 브라질 같은 세계적 축구 강국들을 상대로 0-2, 0-3 정도의 점수차로 진 셈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생뚱맞을 수도 있겠지만 2010년대 초반에 브라질이 탄자니아와 친선 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 때 브라질이 탄자니아를 5-1로 이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브라질에 대해서 평가하는 게 아니라 탄자니아가 브라질 상대로 골을 넣었다며 감탄했다.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다.[8] 올림픽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는데 8-0씩 대파당했던 피지가 멕시코와 붙을 때 멕시코가 5-1 로 이긴 경우도 있다.[9]

즉 이게 꼭 한국을 흉볼 이야기는 아님에도, 당시 월드컵 본선에 아시아나 아프리카가 참가하여 유럽과 남미 참가국이 줄어든다는 우려의 의견을 표하던 이들이 그 명분으로 삼았던 일도 있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전쟁피해를 복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스포츠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10]

시대가 시대여서 이런 상황에 대표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할 리는 없었고, 되려 일본과의 최종예선에선 대통령의 반대로 홈 경기마저 치르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11] 이러한 악재를 극복하고 기어이 일본을 꺾고서 본선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거기에 당시 대한민국은 여권 발급과정이 더럽게 복잡해서 이것만으로도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대한축구협회는 창설된지 얼마 안 되어 행정력에서도 굉장히 미숙했는데 단복조차 맞추지 못해 임원이 아는 집에서 외상으로 빌려 입어야 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질조차 좋지 못해 금새 닳고 말았다.[12]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 대표팀은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조차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일단 미군의 수송기를 얻어타고 무작정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국제선이 발달해 있던 일본의 도쿄 국제공항으로 간 다음에 스위스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야 간신히 도쿄 - 방콕 - 콜카타 - 로마 - 취리히로 이어지는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다.[13] 그나마도 티켓이 모자라서 날짜조차 못 맞출 뻔했는데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영국인 신혼부부가 이들의 사연을 접하고는 월드컵인데 못 가는게 말이 되느냐며 딱하게 여겨 자신들의 비행기 티켓을 양보한 덕에 1진이 먼저 출발해서 경기 날짜만 간신히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14]

이 때문에 한국 대표팀은 본선에 진출하고도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다른 팀들이 전부다 개막 한 달 전부터 모여서 현지 적응 훈련하고 뭐하고 할 때는 물론 월드컵이 개막된 이후에도 스위스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렇게 대한민국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경기 이틀 전 오후 10시였다. 그러나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스위스에 도착해서 숙소를 제대로 찾아갈 리도 없었고, 그렇게 간신히 숙소를 찾아가고 나서도 당시 대표팀에는 주무고 뭐고 없었으니 경기 하루 전날인데도 선수들이 직접 유니폼 바느질을 한다거나 축구화 손질을 한다거나 하면서 밤새 바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한국 대표팀은 시차적응이나 피로회복은 고사하고 온갖 고생만 잔뜩 한 끝에 유니폼만 갈아입고 바로 세계최강 헝가리와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런 악재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헝가리전 당시 전반 초반 20여분까지는 헝가리의 공격을 비교적 잘 막아냈고, 이때 헝가리 키퍼와 1:1 기회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초반에 경기가 안 풀리자 헝가리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헝가리는 경기 초반 의외의 고전을 한 것이 부끄러웠던 것인지, 이후 대한민국이 체력적 문제로 급격히 경기력이 떨어지는 틈을 타 최선을 다해 대한민국의 골문을 괴롭혔고, 그렇게 100개가 넘는 슈팅 속에서 9실점 밖에 안한 한국 팀은 알고 보면 정말 눈물겨운 투혼을 발휘해 싸운 것이다.

실제로 당시를 회고한 축구 원로들은 후반전에 다리가 풀리고 쥐가 나는 와중에도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90분을 뛰었다고 밝힌 바 있다. 게다가 당시 한국 대표팀은 딱 11명에 맞춰 1진만 온데다가 당시엔 골키퍼를 제외하면 선수교체 규정조차 없어서 쥐가 나거나 탈진해서 쓰러진 4명이 나간 뒤에는 7명만 뛰어야 했다. 이런 눈물겨운 투혼 때문에 이날의 승장이었던 헝가리의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 또한 "한국 팀은 사자처럼 용감했다. 쓰러져도 계속 일어나 뛰었다."고 칭찬했다.

그 때문에 월드컵을 관전하러 온 세계의 축구팬들에게 한국은 그저 구색이나 맞추기 위해 출전한 들러리로 평가되던 초반의 시선을 떨쳐내고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고 월드컵 본선까지 올라온 위대한 불굴의 팀으로 각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경기를 중계했던 유럽 방송국의 해설자들 또한 “한국 대표팀은 전쟁이 끝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나라의 선수들입니다.[15] 하지만 그들은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분들께서 이들에게 응원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겼고, 한국 팀의 이런 내막을 알게 된 유럽의 축구팬들은 갑자기 한국팀 선수들의 숙소에 들이닥쳐서 점퍼, 청바지, 소시지, 통조림, 자기 나라 현금, 손목시계 등등 각자 갖고 있는 물건들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돌아갔다. 특히 헝가리전에서 전설로 남아있는 선방쇼를 선보였던 홍덕영 골키퍼에게는 현지인들이 사인도 받아갔다고 한다. 이런 유럽인들의 대인배적인 사랑 앞에 당시 대한민국의 선수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쉽게 말해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그들이 거둔 성적과 상관없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한 난민 대표팀 선수들에게 전세계가 표한 것과 같은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헝가리전에서의 대패로 인해 분위기도 가라앉은 데다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진을 다 뺀 한국은, 뒤늦게 간신히 스위스에 도착한 2진 선수들을 주축으로 이후 2차전 터키와의 경기를 치렀으나 역시 매우 무기력한 경기를 펼쳤고, 결국 0-7로 대패하고 말았다.[16]

게다가 그 당시 대한민국 선수단은 월드컵 경기 입장료의 일정액을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대한민국 선수단이 묵었던 호텔로 ‘경기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대한민국 선수단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까지 온 과정도 매우 험난했기에, 귀국도 서두르기 위해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

당시 대한민국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용식 감독은, 대진운만 보고도 이미 대한민국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 져도 좋다. 그러나 한 골만 넣자. 그래야만 전쟁 때문에 헐벗고 힘든 우리 국민들 조금이라도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나?"라는 그 유명한 말로 선수들과 전의를 다지고 경기에 임했지만, 그 한 골을 넣기에도 세계와의 격차가 너무도 컸고, 조 추첨 운도 너무 없었으며, 열악한 조건 탓에 스위스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제대로 경기를 준비할 시간도 없었기에 끝내 그 소박한 목표조차 이루지는 못했다.[17]

이러한 시련을 겪었던 대한민국 대표팀이 시간이 흘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을 달성하고, 원정 첫 승에 원정 16강까지 달성한 것이 대회 우승국이었던 독일까지 월드컵 본선에서 무너뜨리는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까지 연출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와도 같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8]

4.2. 토너먼트

지난 대회와 달리 스위스 대회서부터 조별리그 이후 결선리그가 아닌 토너먼트를 치루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이전의 월드컵은 각 조에서 오직 1위만 살아남고 2위 이하는 광탈하는 방식(1930, 1950)이거나 조별리그 자체가 없는 완전 토너먼트 방식(1934, 1938)이었다. 이 대회부터는 각 조의 2위도 생존하게 되었다. 그런데 토너먼트 대진표 작성이 매우 이상했다. 어떤 조의 1위와 다른 조의 2위가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붙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대회 8강 토너먼트는 한쪽에 각 조 1위들을 죄다 몰아넣고 다른 한쪽에 각 조 2위들을 죄다 몰아넣었다. 실제로 하단의 대진표를 보면 4개 조의 1위인 브라질, 헝가리, 우루과이, 잉글랜드가 결승 티켓 한 장을 놓고 혈투를 벌인 것을 알 수 있다. 서독은 조 2위를 해서 다른 3개 조의 2위 국가과 경쟁한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결승에 진출했고, 결국 우승까지 했다. (다음 대회부터는 정상적인 대진표로 바뀌었다.) 실제로도 서독은 이걸 노리고 헝가리에게 고의로 패해줬다는 의혹이 있다. 그리고 서독이 터키를 이기는 바람에 둘이 승점이 동일해졌고 재경기로 서독이 2라운드에 진출했다.

8강 첫 경기에서 오스트리아와 홈팀 스위스의 알프스 더비에서 전반에만 9골이 나오는 엄청난 난타전 끝에 오스트리아가 7:5로 스위스를 제압하고 4강에 진출했다. 그런데 이것은 전반 20분까지 스위스가 3:0으로 앞서다가 오스트리아가 명추격을 하고 역전을 이루어 전반전을 5:4로 오스트리아가 앞선 채로 끝냈다.

8강 2차전에서는 전 대회 챔피언 우루과이는 명불허전 세계최강답게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추격을 뿌리치고 4:2로 승리하며 월드컵 2연패를 향해 순항했다. 전반 30분까지는 1:1로 양팀이 그럭저럭 박빙의 승부를 연출했으나 전반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우루과이가 연달아 두 골을 내리 퍼부어 놓는 바람에 잉글랜드는 망했다. 잉글랜드는 지난 대회에서도 약체 미국에 패하며 온갖 망신을 다 당했던 전례가 있었기에[19], 이 대회를 끝으로 FIFA의 영국 우대정책은 폐지되었다.[20]

8강 3차전에선, 지난 대회의 비운을 설욕하러 온 브라질이 상술한 이상한 대진표 때문에 당대최강 헝가리와 너무 일찍 부딪혀 2:4로 패하고 매직 마자르는 순항을 계속했다. 이 경기는 베른의 난투극으로 회자되는데 헝가리의 히데구티 선수가 골을 넣고 세레머니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영 좋지 않은 곳이 허전했다. 브라질의 수비수가 히데구티를 수비한답시고 히데구티의 바지를 잡아당겨 찢어버렸는데 이 때문에 히데구티는 관중들에게 성기를 드러내고 말았다. 이게 원인이 되어 경기가 중단되고 양팀간에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경기결과는 헝가리가 이기긴 했으나 경기가 끝난 이후에도 패싸움은 계속 되었다. 결국 경찰력으로 간신히 패싸움을 저지했다.

8강 4차전에선 서독이 유고슬라비아의 자책골과 후반 쐐기골로 2:0으로 이기며 4강행 마지막 티켓을 손에 넣었다. 서독은 정말 쉽게 올라갔다. 그러면서 서독은 체력을 회복하며 슬슬 우승 준비를 하고 있었다.

4강 1차전,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와 매직 마자르 헝가리의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다. 헝가리가 전후반 각 1골씩 넣어 2:0으로 이기나 싶던 경기는 후반 30분과 41분에 연이어 터진 우루과이의 추격/동점골로 원점으로 돌아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다시 연장 전반 15분을 아무 소득 없이 마친 두 팀의 경기는 연장 후반 체력이 다한 우루과이를 몰아붙인 헝가리의 파상공세로 4:2로 끝났다. 4강 2차전에선 서독이 가장 손쉬운 상대인 오스트리아를 만나며 6:1로 압승하며 결승전에서 헝가리와 리턴매치를 벌였다.

3/4위전에서 헝가리와 120분 혈전을 치룬 우루과이를 오스트리아가 사실상의 홈버프를 받으며 3:1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킨 가운데 7월 4일 대망의 결승전이 치러졌다. 조별예선에서의 경기 결과도 있고 해서 모두들 헝가리가 이길 것이라 생각했으나, 헝가리는 8강 브라질-4강 우루과이라는 최악의 대진을 혈전으로 치뤄가며, 특히 4강전을 연장전까지 치루며 체력이 다 소진되고 푸스카스마저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상황.

그럼에도 헝가리는 전반 8분까지 연달아 두 골을 넣으며 기세를 올렸다. 경기는 헝가리쪽으로 기울고 서독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심정으로 메스암페타민까지 복용해가며[21] 있는 힘 없는 힘 짜내어 전반 10분의 추격골과 18분의 동점골로 2:2 균형을 맞춘다. 모두들 또 연장전까지 가나 하는 후반 39분, 헬무트 란의 결승골이 터졌고 결국 서독이 헝가리에 3-2로 승리하여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서독의 승리가 얼마나 간신히 이뤄진 거냐면, 당시 서독은 아디다스에서 만들어 준 과학적 축구장비들을 착용하고 뛴 최초의 팀이었다. 또한 경기 당일에는 많은 양의 비가 쏟아졌는데, 이러한 기후에서는 아디다스에서 만들어준 기후별로 교체 가능한 스터드를 가진 축구화가 특히 강점을 보여줬다. 그뿐 아니라 서독 대표팀의 주장이었던 프리츠 발터는 비가 오는 때에 가장 잘 뛰기로 유명한 선수였고, 그러한 이유로 당시 서독에서는 비가 오는 기후를 프리츠 발터의 날씨(Fritz Walter-Wetter)이라고 불렀었다. 즉 서독은 수월한 대진운을 속에 과학적 축구장비의 효과에 힘입은데다가 기후의 도움까지 받았고, 이와 반대로 지옥같은 대진을 거친데다가 에이스의 부상과 연장 혈투까지 겪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집단 패싸움까지 벌이는 악재 속에 결국 결승까지 올라온 헝가리에게 겨우겨우 승리한 것이었다.

이로써 헝가리는 우승 문턱에 좌절하고 서독은 출전금지가 해제되어 나선 첫 대회에서 바로 우승을 차지하며 패전으로 의기소침해있던 서독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 결승전을 서독에서는 아직까지도 베른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기억한다.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A

8강 1경기
브라질 2:4 헝가리

E

4강 1경기
헝가리 4:2 우루과이

G

결승
헝가리 2:3 서독

B

8강 2경기
우루과이 4:2 잉글랜드

-

C

8강 3경기
유고슬라비아 0:2 서독

F

4강 2경기
서독 6:1 오스트리아

D

8강 4경기
오스트리아 7:5 스위스

H

3/4위전
우루과이 1:3 오스트리아

1954 FIFA 월드컵 우승


서독

첫 번째 우승

5. 결과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서독

5

4

0

1

18

12

+6

8

우승

2

헝가리

5

4

0

1

27

10

+17

8

준우승

3

오스트리아

5

4

0

1

17

12

+5

8

3위

4

우루과이

5

3

0

2

16

9

+7

6

4위

5

브라질

3

1

1

1

8

5

+3

3

8강

6

잉글랜드

3

1

1

1

8

8

0

3

8강

7

유고슬라비아

3

1

1

1

2

3

-1

3

8강

8

스위스

3

1

0

2

7

10

-3

2

8강

9

터키

2

1

0

1

8

4

+4

2

1라운드

10

이탈리아

2

1

0

1

5

3

+2

2

1라운드

11

프랑스

2

1

0

1

3

3

0

1

1라운드

12

벨기에

2

0

1

1

5

8

-3

1

1라운드

13

멕시코

2

0

0

2

2

8

-6

0

1라운드

14

체코슬로바키아

2

0

0

2

0

7

-7

0

1라운드

15

스코틀랜드

2

0

0

2

0

8

-8

0

1라운드

16

대한민국

2

0

0

2

0

16

-16

0

1라운드

6. 기록실

  • 최초 득점 – 밀루티노비치(유고슬라비아), vs 프랑스(6월 16일), 전반 15분
  • 퇴장 – 없음
  • 최초 페널티킥 – 레몽 코파(프랑스), vs 멕시코(6월 19일), 후반 43분
  • 최초 멀티골 – 핑가(브라질), vs 멕시코(6월 16일), 전반 34분&43분 * 해트트릭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vs 대한민국(6월 17일, 조별리그)
    • 카를로스 보르게스(우루과이), vs 스코틀랜드(6월 19일, 조별리그)
    • 에리히 프롭스트(오스트리아), vs 체코슬로바키아(6월 19일 조별리그)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vs 서독(6월 20일, 조별리그). 해트트릭을 넘어서서 1경기 4골을 기록했다.
    • 브루한 사흐린(터키), vs 대한민국(6월 20일, 조별리그)
    • 막스 모를락(서독), vs 터키(6월 23일, 조 순위결정 플레이오프)
    • 시오도르 바그너(오스트리아), vs 스위스 (6월 26일, 8강전)
    • 요세프 휘거(스위스), vs 오스트리아 (6월 26일, 8강전)
시오도르 바그너와 요세프 휘거의 해트트릭 기록은 한 경기(8강 오스트리아 vs 스위스)에서 동시에 기록되었다.
  • 최다 득점 경기 - 오스트리아 7 vs 5 스위스 (8강, 6월 26일)
  • 최다 득점차 경기 – 헝가리 9 vs 0 대한민국 (조별 리그, 6월 17일)
  • 최초 역전승 - 서독 4 vs 1 터키(조별 리그, 6월 17일)
  • 자책골
    • 지디 디킨슨(잉글랜드), vs 벨기에(조별릭, 6월 17일)
    • 라울 카르데나스(멕시코), vs 프랑스(조별리그, 6월 19일)
    • 이반 호바트(유고슬라비아), vs 서독(8강전, 6월 27일)
    • 루이스 크루즈(우루과이), vs 오스트리아(3/4위전, 7월 3일)
  • 무득점팀 - 체코슬로바키아, 스코틀랜드, 대한민국
  • 득점왕 - 산도르 코츠시스(헝가리), 11골

7. 기타

이 월드컵에서는 대회에 참가한 모든 팀들이 최소 1패 이상을 기록하였다.

  • 1조
    • 브라질은 8강에서 헝가리에게 2-4로 패배했다.
    • 유고슬라비아는 8강에서 서독에게 0-2로 패배했다.
    • 프랑스는 조별리그에서 유고슬라비아에게 0-1로 패배했다.
    • 멕시코는 조별리그에서 브라질에게 0-5로 패배하고 프랑스에게 2-3으로 패배했다.
  • 2조
    • 헝가리는 결승에서 서독에게 2-3으로 패배했다.
    •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3-8로 패배했다.
    • 터키는 조별리그에서 서독에게 1-4로 패배했다. 본선 진출을 가리기 위해 서독과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서독에게 2-7로 패배했다.
    •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헝가리에게 0-9로 패배하고 터키에게 0-7로 패배했다.
  • 3조
    • 우루과이는 준결승에서 헝가리에게 2-4로 패배했다.
    • 오스트리아는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1-6으로 패배했다.
    • 체코슬로바키아는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에게 0-2로 패배하고 오스트리아레게 0-5로 패배했다.
    • 스코틀랜드는 조별리그에서 오스트리아에게 0-1로 패배하고 우루과이에게 0-7로 패배했다.
  • 4조
    • 잉글랜드는 8강에서 우루과이에게 2-4로 패배했다.
    • 스위스는 조별리그에서 잉글랜드에게 0-2로 패배하고 8강에서 오스트리아에게 5-7로 패배했다.
    • 이탈리아는 조별리그에서 스위스에게 1-2로 패배했다. 본선 진출을 가리기 위해 스위스와 플레이오프를 했는데 여기서 스위스에게 1-4로 패배했다.
    • 벨기에는 조별리그에서 이탈리아에게 1-4로 패배했다.

대회 포스터 중에 태극기가 완전히 가려진 것도 있다.# 당시 안습했던 한국의 국가 인지도를 느끼게 해 준다.


  1. [1] 게다가 2차대전의 여파는 다음 대회까지 이어져서, 이 다음 대회 역시 대전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웨덴에서 개최되었다.
  2. [2] 헝가리의 이 승리 기록은 이후 1974년 대회에서 유고슬라비아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를 상대로 거둔 9:0 승리, 1982년 대회에서 헝가리엘살바도르를 상대로 10:1로 승리한 경기들과 함께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 최다골 차 승리 기록이다.
  3. [3] 독립을 한 '주권국가'로 한정짓지 않을 경우 인도네시아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한 국가다. 인도네시아는 1938 프랑스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했는데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4. [4] 본래 스페인에게 할당되었으나 예상외로 스페인이 예선에서 동전던지기 끝에 터키에 탈락하자 FIFA는 부랴부랴 터키에 상위시드를 주었다.
  5. [5] 이 패배는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최다골 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6. [6] 또한, 당장 서독이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헝가리를 꺾고 우승한 것을 왜 베른의 기적이라고까지 부르는지 생각해보자. 더구나 우루과이는 직전 대회인 1950년 월드컵의 우승국이고, 브라질은 이 다음 대회인 1958년 월드컵의 우승국이니, 즉 헝가리는 연달은 3개 대회의 챔피언을 모두 완파했을 정도로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던 무서운 팀이었다.
  7. [7] 1998 FIFA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대한민국이 네덜란드0-5로 대패했을 당시, 대한민국의 골키퍼였던 김병지만은 외신의 찬사를 받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 경기 역시 김병지의 선방이 없었다면 5골보다 더 큰 점수차가 나올 여지가 충분했던 경기였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때는 한국 대표팀의 상황이 199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8. [8] 최근 성인국대의 사례로는 2018년에 첫 진출한 파나마도 순위는 꼴지이지만, 열심히 뛰었고 또한 골을 하나라도 넣었다.
  9. [9] 심지어 당시 피지가 넣은 1골은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넣은 골이 아닌 선제골이었다.
  10. [10]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적인 상황만 놓고 봐도 월드컵 전엔 대통령 이승만이 경찰을 이용하여 5.20 총선을 흔들고 있었고 월드컵 이후에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촌극까지 벌이던 시대였다. 또한 그 다음해인 1955년은 가난했던 시절을 뜻했던 쌍팔년도의 어원이 되었던 해였다.
  11. [11] 현재는 이런 식으로 정부나 정치계에서 축구에 지나친 개입을 할 경우, 그 나라는 FIFA 차원에서 중징계를 때려 대회 출전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12. [12] 이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본 외신 기자 중 한 명이 “당신들 나라에서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이때 헝가리전에서 전설적인 선방쇼를 선보인 골키퍼 홍덕영이 “우리나라는 전쟁을 겪은 나라라서 물자를 절약하는 것을 애국하는 일로 여겨 바지를 짧게 입었다”고 재치있게 받아넘겼다는 웃지 못할 일화가 전해진다.
  13. [13] 참고로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취리히로 바로 가는 직항편이 있으며 대한항공(동: KE933/934, 하: KE917/918) 이 주3회 운행한다.
  14. [14] 2진은 뒤늦게 구한 에어 프랑스의 항공편을 통해 스위스에 도착했다.
  15. [15]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중단됐다. 스위스 월드컵은 1954년 6월.
  16. [16] 하지만 여기서 한국을 이긴 터키 역시 서독과 두 번 붙어 두 번 모두 패배하며 한국과 나란히 탈락의 쓴 잔을 들이키고 만다. 그것도 1차전 1-4, 2차전 2-7 스코어로 두 경기 모두 서독이 압승했다.
  17. [17] 실제로 지금도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세계적인 강팀조차 제대로 된 현지 적응과 훈련 없이 바로 경기를 할 경우, 볼리비아 같은 전력상 한 수 아래 팀에게 완패당하는 사례가 흔하다. 특히, 2010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아르헨티나는 볼리비아 현지 적응 훈련도 전혀 하지 않은 탓에 그 볼리비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1-6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대패당하기도 했다. 하물며 대한민국은 당시 대회 최약체 수준의 전력이었고 상대는 당대 최강을 넘어 역대 최강의 대표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헝가리였다. 뭐가 될래야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18. [18] 아이러니하게도 헝가리는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이 다시 월드컵에 출전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32년째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19. [19] 게다가 그 미국도 정예가 아닌 이민자들, 그리고 유학생들 위주로 급조된 전형적인 아마추어팀이었다. 그런 팀한테 패한 것이다.
  20. [20] 잉글랜드는 타국과의 교류를 거부하면서도 1930년까지는 매우 강했다. 허나 너무 우대정책을 펼쳤던 탓에 이 시대의 제한적인 방식으로나마 여러 인종, 민족, 문화의 세계 축구인들이 서로 교류하며 실력을 발전시키는 사이 보기좋게 도태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만 공교롭게도 영국 우대정책이 폐지된 첫 대회인 1958년에는 영국 홈네이션 4개국이 모두 본선에 진출했다.
  21. [21] 이때까지만 해도 메스암페타민은 합법의약품이었고, 운동경기에서 금지약물이란 개념이 전혀 없었기에 지극히 합법적이었다. 하지만 서독 선수들이 비타민이라고 둘러댄 걸 보면 다소 비신사적인 행동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특히 당시 축구는 신사의 스포츠라고 불렸기 때문에 페어플레이를 중시했고, 그때문에 다음 대회인 스웨덴 월드컵 결승전에서 홈팀 스웨덴이 공정해야 한다고 결승전 상대인 브라질에 불리하지 않게 잔디를 관리해 주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2010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관련 논문을 내놓기는 했지만 정작 1954년 월드컵이란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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