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연쇄 분신 파동

이 항목은 분신정국으로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1. 개요
2. 사건의 배경
3. 잇따른 분신 자살
3.1. 김지하박홍의 카운터 어택
4. 필살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5. 운동권의 병크, 정원식 계란세례 사건
6. 결말과 평가

1. 개요

1991년대한민국을 잇달아 뒤흔든 연쇄 분신자살 사건. 일명 분신정국.

2. 사건의 배경

1987년 대선에서 당선되어 1988년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 사람을 내세우면서 군부 정권 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후 열린 총선에서 민정당이 참패하고 민주, 평민, 공화당의 야 3당이 과반 의석을 넘게 차지하는 여소야대의 결과가 벌어졌다.

여소야대 구도가 되면서 민정당과 군부정권 출신들은 잇다른 12.12 사태, 5.18 민주화 운동 청문회5공비리 청문회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민주화 흐름을 타고 4.19 혁명 이후와 마찬가지로 통일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잇단 방북, 평민당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은 노태우 정권을 긴장시켰다. 더욱이 노태우 대통령은 선거 공약으로 중간평가를 제시한 상황이라 그야말로 정권은 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으로 치달았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꼼수로 인위적 정계개편을 시도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3당 합당이었다.[1] 3당 합당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노태우 정권은 그동안 물태우라 불린 원한을 씻고자 끌려다니던 것에서 벗어나 초강경 자세로 돌변했다. 5공 청산은 유야무야 되어버렸고, 재야와 운동권에서 일던 통일 논의도 공안 정국을 조성해서 눌러버렸다.

상황이 이리되자 다시 80년대에 보던 데모가 부활했다. 대학가에선 연일 데모가 일어났고 경찰과 학생 시위대 간에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또한 1991년 봄 '수서비리'[2]로 인해 민심 또한 6공정부를 떠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합당 이후 1990년 두 차례 치러졌던 재보궐선거에서도 모두 민자당이 패배하여 민자당의 지지율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사실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보면 집권 첫해에 40-50%대를 기록한걸 제외하면 노태우 정부의 지지율은 내내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무응답층의 비율이 상당하긴 하지만 부정평가 역시 무시할만한 수준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학생이던 강경대 열사[3]가 데모를 막으려 출동한 서울시경 제4기동대 소속 백골단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4]

강경대의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을 정점으로 치닫게 한 이한열의 죽음과 오버랩 되면서 대학가와 운동권은 크게 격앙되기 시작했다. 이에 운동권에서 정권에 대한 항의로 선택한 수단이 바로 분신자살이었다.

3. 잇따른 분신 자살

강경대의 죽음은 1991년 5월을 그야말로 피로 물들였다. 강경대가 죽은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현장에서 분신했다. 이어 5월 1일에는 안동대 학생 김영균, 5월 3일에는 경원대 학생 천세용,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후 투신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5] 이때까지 무려 11명이 분신자살을 택하는 사태가 일어난것이다.

잇단 분신자살에 노태우 정권은 크게 당황해 4월 26일부터 5월 6일까지 각 언론사 정치부장, 사회부장, 편집부장들을 불러 밥 한끼 사주면서 회동을 가졌다. 청와대에 다녀온 언론사 간부들의 지시였는지 한겨레를 제외한 당시 주류 언론들은 잇달아 학생들의 분신자살을 비난하는 기사들을 싣게 했지만 일선 기자들의 반발에 부딛쳤다. 각 방송사[6]도 학생들을 비난하는 뉴스를 내보냈다가 노조의 반발에 직면했다.

3.1. 김지하박홍의 카운터 어택

상황이 이리되자, 다급해진 노태우 정권은 은밀한 카운터 어택을 준비하니 바로 김지하박홍이었다.

유신정권에 맞서다가 감옥에 갔다온 뒤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에 조선일보에 칼럼을 게재해서 분신자살을 맹비난 했다. 이 때의 칼럼 제목이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임팩트가 워낙 컸던지라 아직까지도 김지하하면 회자되는 칼럼이다. [7]

김지하의 맹비난 이후 노태우 정권은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어 서강대 총장 박홍은 5월 8일 서강대 메리홀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며 매카시즘적인 종북 간첩 음모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 카운터 어택을 조선일보가 나서서 협공해주면서 사태는 점점 운동권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어갔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로 간주되었던 인물들이라 국민들의 눈에는 민주화 선배들이 저렇게 말하는걸 보니 이건 문제가 많구나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또한 사람의 생명에 대한 한국인들의 정서[8]에 죽음이 어울리지 않다 보니 여론이 점점 운동권쪽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또한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운동권 정파소속이 아닌 일반 시위참여자들이나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매주 주말 도심이 마비되는 시위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4. 필살기,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이런 상황에 결정적인 필살기로 등장했던것이 바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이었다. 검찰은 5월 8일 분신자살한 김기설이 자기 의지로 분신자살한게 아니라 운동권에서 온갖 협박과 감언이설로 분신자살하라고 내몰았으며, 그 증거가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한 것이다.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었다.

이런 검찰의 발표는 김지하와 박홍의 카운터 어택과 일치하는 맥락이라서 국민들의 시선은 운동권에 급속도로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강기훈은 자신은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나 국과수 감정인 김형영은 강기훈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했고 결국 이것이 결정적 증거로 채택되어 강기훈은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14년 2월, 재심 끝에 강기훈 씨가 무죄 판결을 받으며 사건 자체가 조작의 결과였다는 점이 인정되었다.[9]

5. 운동권의 병크, 정원식 계란세례 사건

이런 가운데 운동권은 셀프 빅엿을 먹는 병크를 터트리는데, 바로 1991년 6월 3일의 정원식 총리 서리 폭행 사건이었다.

전직 문교부장관을 지냈던 한국외대 교수 정원식은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새 국무총리로 임명되었고 교수로서의 마지막 강의를 하던 차였다. 그러나 정원식의 총리직 수락에 불만을 품은 운동권 학생들은 정원식이 문교부 장관을 하면서 전교조를 탄압했다[10]라고 부르짖었고 이에 정원식이 강의를 중단하고 나오자 훈훈한 사제의 정을 담은 계란, 밀가루 세례를 퍼부었다 단순히 계란만 던진 정도가 아니라 15명이 주도적으로 가방으로 머리를 때리고 강제로 교실에서 끌고나와 운동장으로 끌고가서 폭행하는 등 육체적인 폭력 행위도 있었다. 정원식의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들과 운동권 학생들간의 격렬한 몸싸움도 벌어졌다.

그런데 현장에는 새 총리 지명자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있던 터라 이 광경은 고스란히 전파와 사진으로 전국에 생생히 중계되었다. 이 광경에 국민들은 스승에게 저런 짓거리를 하는 놈들이 어디있느냐며 운동권을 천하의 개쌍놈들로 규정하게 되었다.[11][12] 원래 주요 언론에선 사건 당일엔 정원식 총리서리가 봉변을 당했다는 정도로 가볍게 넘어갔으나 방송이 나간 후 즉각 전국에서 스승에게 저런 패륜적인 짓을 할 수가 있냐는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다음날부터 매우 대대적인 보도를 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75%의 국민들이 반인륜적, 반도덕적이라 하였고 83%의 국민들이 충격적이었다고 운동권에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6. 결말과 평가

운동권은 6월에 대대적인 저항을 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시선은 이미 싸늘해질대로 싸늘해진 뒤였다. 80년대에는 데모하던 학생들을 숨겨주던 국민들은, 이때는 오히려 물을 끼얹거나 소금을 뿌리면서 내쫒는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5월 말에 성균관대 김귀정이 시위진압도중에 사망하는 사건[13]이 발생했지만 이 사건이 정국을 반전시키는데 끼친 영향은 별로 없었다.

국민들의 반감은 그대로 선거로 나타났다. 6월 20일에 치뤄진 광역의회 선거에서 투표율이 크게 저조하게 나왔고 이 투표율 저조현상이 신민련-민주당간의 후보분열과 함께 시너지 작용을 하면서 민자당은 득표율이 상당히 낮았음에도 (40.6%) 전국의석 564석(총 의석수 868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고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전 지역의 도의회, 시(특별시, 직할시)의회를 민주자유당이 장악했다.[14]

광역의회 선거는 물론 여름방학이 지나고 2학기가 되어서도 학생운동세력은 위축된 채 변화가 없었다. 심지어 1991년 9월 서울대학교에서 시위도중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한국원이 사망[15]했을 때에도 그해 봄과 같은 대규모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16] 그나마 다음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자당이 과반수 확보를 못한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라려나... 물론 민중당도 광탈했긴했지만

2010년대의 현재에 와서는 이때의 분신정국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노태우 정권에 대한 정당한 항의였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아무리 옳은 투쟁이었다고 해도 분신이란 수단은 잘못되었다는 평가[17]가 공존하는 상황.

윤이상은 이 소식을 접하고 말년의 걸작이라 불리는 "화염속의 천사"라는 곡을 작곡했다. 이 곡은 한국에서 그야말로 한두번정도밖에 공연되지 않았을 정도인데, 처음 이 곡이 초연되었을때는 정치적 논란을 감수한 과감한 행동이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또한 이 사건은 초원복집 사건과 더불어 신문과 방송의 여론 규정과 의제 설정 기능이 강력하게 작동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386세대의 세대 구분에서 80년대 학번이 아닌 90,91학번을 넓은 의미의 386세대로 보는 의견이 있는데 바로 이 사건을 전후로 해서 대학가 학생운동의 위세가 많이 차이나기 때문이다.[18][19]


  1. [1] 1990년 5월. 물론 합당 당일 서울역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2. [2] 강남구 수서동 수서지구 택지분양 과정에서 일어난 6공화국 최대 비리사건. 수서지구 택지를 한보그룹에 특별분양하는 과정에서 정,재,관계의 지도층 인사들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구속되면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됐지만 관련 피고인 9명 중 6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나 단순 독직사건으로 축소된 채 마무리돼 6공의 대표적인 의혹사건으로 남았다.
  3. [3] 현재 민주열사로 인정을 받았다.
  4. [4] 전경이라는 말이 있지만 사복체포조 백골단이 맞다. #
  5. [5] 김기설의 분신자살은 또 다른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참조.
  6. [6] KBS, MBC. 사건당시 SBS는 아직 개국 전이었다.
  7. [7] 원래 김지하가 붙인 제목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으나, 조선일보의 데스크가 편집 과정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로 제목을 교체했다. 김지하의 이 칼럼이 신문에 발표된 이후, 사회 각계에서는 이를 둘러싼 맹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어쨌든 이 칼럼 제목은 꽤 임팩트가 컸고, 그 후로도 상당히 회자되었다. 그리고 민주화 투사던 김지하는 이 때부터 점점 보수화되어간다.
  8. [8] 1991년 3월부터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지만 사태가 이처럼 커진 데에는 보수, 중도, 진보를 막론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라는 한국적 정서가 있었다. 즉 경찰의 쇠파이프에 대학생에 죽었다는 것에 정치적 관점과 상관 없이 많은 시민들이 분노해서 마치 87년 6월 항쟁을 연상할 정도(6월 항쟁 자체도 故 이한열학우 사망사건 때문에 그처럼 커졌다)로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으며 동시에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의견을 표출하는 것 또한 똑 같은 이유(생명의 소중함)로 일반 시민들에게 분신정국이 점차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 즉 죽음 때문에 시위가 커졌고 죽음 때문에 상황이 반전된 것.
  9. [9] 2015년 5월 14일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했다.
  10. [10] 정원식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 당시 전교조를 불법화하고 전교조 인사들을 해임시켰다.
  11. [11] 전교조가 국민들에게 인정을 못받았던 이유가 교사는 스승이다는 관념이 아직 뿌리깊게 남아있던 시점이란걸 상기해보자.
  12. [12] 당시 밀가루와 계란을 투척했던 학생들은 2006년 모두 명예회복 조치 되었다. 같은 시기 영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으나 경찰은 투척차들에게 총리 양복 세탁비를 변상하라는 정도로 판결했다. 문화의 차이.
  13. [13] 즉 방법만 달랐지 경찰에 의해 학생이 사망한 것은 동일하다.
  14. [14] 참고로 1991년 광역의원 선거 투표율이 58.9%로 1991년 기초의원 선거때보다(55.0%) 다소 높긴했지만, 당시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80%를 넘고 국회의원 총선 투표율이 70%를 넘던 시절이라는걸 생각해보자.
  15. [15] 경찰의 총탄에 의한 사망이다. 쇠파이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론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이였지만 공포탄이 아닌 실탄을 장착했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학교가 서울대학교...
  16. [16] 그러다보니 운동권 세력은 늦가을에 있을 각 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주력함과 동시에 이듬해(1992년)에 있을 대선정국을 위해 일단 한발 물러선다.
  17. [17] 백번 양보해서 분신이라는 수단이 옳더라도 전체적인 정국흐름에 둔감해서(즉 민중의 생각을 파악하지 못해) 결국 역풍을 맞게 되었다는 평가
  18. [18] 1992년은 위에서 언급한 대선정국 자기들 성향에 좀 미흡하지만 당선 가능한 후보 비판적 지지 vs 운동권이 보기에 당선가능성은 낮지만 민중후보 지지 이 있었고 1993년 이후에는 이른바 군사정권이 끝나고 문민 대통령이 들어선 관계로 강경한 시위진압이 별로 없었고 집회는 거의 다 허가했다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강경진압.
  19. [19] 참고로 1989년은 한국만 조용했지 일본은 쇼와가 죽었고, 중국은 천안문 사태가 터졌고,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동유럽의 공산권이 붕괴되었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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